=도보 여행=

부암동 역사기행 걷기

노송☆ 2021. 9. 29. 08:49

@ 2021년 9월 22일

@ 가족 과 함께 부암동 기행에 나선다. 이곳은 내가 서울 구석구석 걷기할 때 처음걸어보고 지금 왔으니 약 25년만에 온거 갔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3번출구로 나와 지선버스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 번을 승차하여 자하문터널입구에서 하차한다.   

한양토성 4소문중 하나인 창의문

@, 자하문 정류장에 내리면 두 개의 동상을 만나는데 이 동상은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와 전투에서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동상이다.

창의문이 있는 자하문 고개 일대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사건과 얽혀 있기도 하다. 바로 ‘1.21사태’다. 이는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31명의 무장공비를 남파한 사건이다.
무장공비들은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관의 첫 검문을 받게 된다.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다 불심검문을 받게 됐고, 정체가 발각돼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때 현장을 지휘하던 최규식 경무관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은 사건 현장인 자하문 고개에 세워졌다.

정종수 경사 순직비

@ 자하문 정류장에서 좌측의 계단을 올라서면 자하문(창의문)에 바로 다가선다. 자하문은 창의문을 자하문이라 불렀다. "자하"란 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자줏빛 금색안개를 뜻한다. 옛날엔 자문밖 부암동 일대가 부한산, 인왕산, 북악산에 둘러싸여 풍광이 수려한 데다 자줏빛 안개가 자주 끼는 선경을 연출하곤 해 자하문이란 별명을 얻었다

창의문은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목계를 달아 놓은 것이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이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1623) 이귀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인왕산 안내도

@ 창의문을 지나 석파정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간다.

창한 날씨에 멀리 북한산이 가깝게 보인다.
석파정앞 조각상

@ 석파정은 세검정 자하문 밖으로 통칭되던 한양 도성의 경승지에, 소계류와 거암 장송을 배경으로 지은 이 정자는 국내 원유정자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사랑채는 1958년 홍지동으로 이전 되었으나 본전 등 나머지는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조선시대의 몇 안 되는 정자이다. 집 뒤에 三溪洞(삼계동)이라고 새긴 큰 바위가 있어 "삼계동정사"로 불렸다. 흥선대원군의 아호 석파(石坡 바위언덕)는 이곳에서 유래했다. 석파정은 대원군의 별장이지만 원래는 철종때 영의정을 지낸 김홍근(1796~1870)의 별서였다. 장안의 으뜸가는 명원을 대원군이 탐내 팔 것을 종용하였으나 김홍근이 거절하였다. 이예 대원군이 하루만 빌려달라 고 했다. 당시 별장이나 정자를 가진 사람은 빌려달라고 하면 부듣불 허락하는 풍습이어서 홍근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대원군은 임금께 한번 행차하기를 권해 임금을 모시고 갔다. 홍근은 임금께서 임했던 곳을 신학의 의리로서 감히 쓸 수 없다 하여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다. 즉 대원군이 빼았은 것이다. 특이한 건물은 집 왼편 계곡의에 걸쳐진 "유수성종관풍루"란 누정이다. 서양식 건축 기법이 더해진 공예물 같은 집이다. 지금은 "석파정 미술관"을 통해서만 석파정에 들어갈 수 있다. 2006년 의약품 업체인 유니온약품 그룹의 안병광 회장이 경매에 나온 석파정을 응찰해 감정가의 83%인 63억 1천만원에 낙찰하였다. 안병광은 석파정입구에 사설 서울미술관을 개관하고 미술관이 석파정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서울미술관과 석파정을 함께 입장료를 받아 15,000원에 표를 팔고 있어 너무 비싸다고 일행들이 관람을 포기하여 세검정으로 향하여 걸어간다.

@세검정(洗劍亭)은 홍제천 일대의 경치를 감살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다. 예로 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여 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정자을 처음 지은 것은 언제인지 확실치 않지만 1748년(영조 24년)에 고쳐 지으면서 세검정 현판을 달았다. 세검정(洗劍亭)이라는 이름은 칼를 씻고 평화를 기원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간물은 194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겸재 정선(1976~1759)이 그린 세검정도(洗劍亭圖)를 바탕으로 1977년 복원한 것이다. 이 곳은 경치가 좋은 계곡에 정자를 지어 자연을 즐기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잘 였볼 수 있는  곳이며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무대가 되었던 서울의 도성 밖 경승지다.

세검정

@세검정을 관람하고 탕춘대터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은혜공인중계사무소가 나오고 이 곳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신영교을 건네 된다.

 

신영교를 건너 빨간 포장도로 위로 올라 선다.
백사실 현통사 방향으로
이 계단을 올라 서면 별천지가 나타난다.
현통사 전경

@ 현통사앞을 지나면 별천지 세상이 펼쳐진다. 깊은 산속을 들어서는 느낌이다.

별서 터 건물은 없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연못 뒤로는 정자 주춧돌이 남아 있다.

 

백사실계곡을 지나 끝 모퉁이에 있는 카페

@ 백사실계곡을 탐방하고 창의문으로 나왔다.  삼청동 가는 길에 무궁화동산을 둘러보고 청와대앞을 지나 삼청동에서 간단한 저녁 식사와 커피  한 잔하고 안국동을 거쳐 종로5가역에서 전철로 귀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