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이야기

휘릉 == 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노송☆ 2016. 11. 21. 20:38

@ 2013년 10월 30일 수요일 맑음

@휘릉(徽陵)은 조선16대 인조의 계비 장령왕후(裝烈王后, 1624-1688) 조씨의 단릉이다.

장령왕후는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효종으로부터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고 불렀다. 10년 뒤인 1659년 효종마저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숙종 14년 자손 없이 승하하여 건원릉 서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 휘릉 가는길

△ 홍살문에서 바라 본 휘릉 정자각

△ 휘릉 정자각은 양 옆에 익랑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 양 옆에 익랑이 붙은 5칸 정자각은 숭릉, 익릉, 의릉과 휘릉밖에 없으며 이 시대에 잠깐 나타난 양식이다. 

   건원릉 이래 헌릉(문종), 목릉(선조), 숭릉(헌종) 다음으로 휘릉이 옴으로써 동오릉(東五陵)이라 불리게 된

   다.  

△ 동편에서 본 정자각

△ 휘릉의 비각

△ 조선국  장렬왕후휘릉

△ 휘릉 능역에서 본 정자각

△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 장렬왕후는 인조 계비에 이어 효종, 현종, 숙종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이 시기에 붕당정치는 장렬왕후(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효종이 승하하자 복상문제로 윤선도 등 남인과 송시열의 서인 다툼으로, 송시열은 자식이 부모앞에 죽었을때 그 부모는 장자인경우 3년상을, 차자일경우 1년 상을 입어야 한다는 성리학을 내세워 효종이 차자이므로 1년상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남인인 윤선도는 차자일지라도 왕위에 올르면 장자가 될 수 있다는 허목의 차장자설을 내세워 효종이 차자이지만 왕통을 이어기에 3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이것이 1차 예송 논쟁이다. 이때는 송시열이 왕권을 능가 하는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서인의 주장이 가능했다.

△ 병풍석없이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 무석인과 문석인

@ 무석인은 목이 없이 얼굴이 가슴에 붙어 있고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커 답답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우직하고 우람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문석인은 이목구비가 크지만 마멸되어 윤곽만 남아 있으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5개이다.  고석에는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귀면(鬼面)이

   새겨져 있다.

@ 현종 15년(1674년)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자 또 다시 자의대비 복상을 두고 2차 예송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며느리복을 시어머니가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는 문제다.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은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인선왕후를 차자부로 대접해 9개월 복상을 주장하고, 남인은 왕비로 대우해 1년 복상을 주장한다.  선왕을 감히 차자로 몰고 갔던 1차 예송논쟁에 불만이  있었던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받아 드렸다. 서인은 몰락하고 남인이 등용된다.

△▽ 양석과 호석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숭릉 5년 뒤에 조성한 릉이라서 석물의 기법과 형식이 숭릉과 거의 비슷하다,

  양석과 호석은 그리 크지 않으면 양석의 경우 다리가 너무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아 있다.

 

 

 

△ 망주석

 

△ 휘릉의 능역 뒤쪽은 능역이 좁아 석물을 언덕에 설치햇다.

△ 곡장 뒤에서 본 휘릉

△때중나무 열매

△깊은 가을 풍경

 

 

△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