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이야기

목릉== 14대 선조 원비인 의인왕후 박씨 능

노송☆ 2016. 11. 21. 20:13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맑음

@ 유교정치를 지향한 조선 왕조는 유교적 국가의례를 매우 중요시 했는데, 다섯가지로 크게 나누어

   五禮(오례)라고 불렀다.

   1), 길례(吉禮) : 각종 제사를 말한다.

   2), 가례(嘉禮) : 왕살과 종친 등의 혼례, 왕세자와 왕비의 책봉, 과거시험, 왕세자 입학, 조하 등을 말한다.

   3), 빈례(賓禮) : 중국 및 이웃나라 사신 접대를 말한다.

   4), 군례(軍禮) : 활쏘기나 강무, 나례를 말한다.

   5), 흉례(凶禮) : 장례절차와 신주의 부묘등을 말한다.

위 다섯가지 의례의 형식를 규범화한 책이 편찬 되었으니 그것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이다.

세종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하여 세조 때 오례를 그림으로 설명한 도식(圖式)이 탈고 되고, 성종 5년(1474)에 편찬이 완료 되었다. 영조 20년(1744)에 수전 보완하여<국조속오례의>라했고 영조 27년(1751) 다시 일부를 보충하여<국조속오례의보>라고 했다.

@ 왕이나 왕비가 승하 하면 오례의 흉례에 따라 3도감을 임시로 설치하여 장례를 치른다.

   1), 빈전도감 :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후 인산(因山) 때까지 관을 모시는 빈전(殯殿)에 대한 일체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한 관아,(습, 염, 성빈, 성복, 혼전, 배비 등의 일을 맡는다.

   2), 국장도감 : 국장(國葬)이 있응때 그 일을 맡아보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관청

                       국상 당일에 조직하며, 장례 뒤 우제가 끝날 때까지 족속한다. 이 기간 동안 국장에 대한

                       모든 업무를 총괄하나, 빈전과 산릉에 관한 일만은 별도의 도감을 성치하여 담당하게 하였 

                       다.

  3), 산릉도감 : 왕과 왕비의 능침 조성을 관장 하였던 임시 관서.

                      왕이나 왕비의 사망 직후 조직되어 장례가 끝나고, 능침과 그 부대시설이 완성 될때까지

                      족속 하였다.(산릉 일대의 토목공사, 매장과 봉축, 각종 석물의 설치, 정자각 등의 건축,

                      주변 환경 정화 등을 주요사업으로 하였다.

 

 

△ 의인왕후 박씨릉

 

△ 문인석

△▽ 무인석

 

△▽ 혼유석의 고석, 고석에는 사면에 귀면이 조각되어 있지만 전면의 귀면은 풍화 작용으로 잘 보이지 않네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조형 되어 있습니다.

 

△ 오른쪽에 있는 무인석과 석마는 손상이 있네요.

 

△ 정자각을 선조릉에 마추다 보니 정자각에서 왕과 왕비의 능역으로 가는 신도는 직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여러번 각도가 꺾여 이어지고 있다.

△의인왕후 능역에서 본 선조능

 

△▽ 석양과 석호

 

△ 뒤에서 본 모습

 

@ 의인 왕후 박씨

정비 의인왕후는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1555년에 태어나 1569년(선조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선조 18세, 왕비 15세였다. 
그때 이미 선조는 소주방 나인(후일 공빈김씨)와 접촉을 하고 있었는데, 의인왕후는, 자기가 자식를 낳을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소용(昭容)에 임하여 적법화 시키고 아껴주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 임해군, 광해군을 극진하게 아끼고 사랑해주었다고 한다.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 2년후 산후병으로 죽었으며 나중에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왕후로 추존되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폐위되자 그녀도 모두 삭탈되었다.
 
공빈 김씨가 죽은 후 선조의 사랑은 인빈김씨로 옮겨가니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 의창군등 아홉을 낳았으며 선조는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신들은 조정 혼란을 막고 민심결집을 도모해야 한다며 세자 책봉을 결사적으로 주청했다. 하는 수 없이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다.
 
인빈 김씨는 신성군을 세자로 올리려고 그렇게 애를 썼지만 임진왜란때 신성군은 죽게 되고 의인왕후등이 광해군을 밀어서 세자가 되었는데 임진왜란때 광해군과 함께 피난을 다닌 의인왕후는 광해군의 뛰어난 지도력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감탄한바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광해군이 임금에 올랐지만 후일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그 인조가 바로 인빈김씨의 아들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 즉 인빈김씨의 손자가 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도망치듯 피난을 떠난 선조는 평양성에서 의주로 피난을 갈 때 의인왕후 대신 인빈김씨를 데리고 피난을 떠났으며 의인왕후는 홀로 강계로 피난을 간다. 평양성을 빠져나가는 선조와 인빈에게 백성들이 돌을 던졌다고 한다.
1593년(선조 26년) 한양이 수복되자 선조는 인빈만을 데리고 오고 의인왕후는 그 후에도 4년간 계속 해주에 머물렀다고 하니 주객이 전도 되어도 보통이 아니다. 1597년 정유재란때도 선조는 인빈을 데리고 다니고 의인왕후는 광해군과 함께 행동한다.
 
그렇게 홧병을 앓던 의인왕후는 1600년(선조33년) 46세를 일기로 승하하니 동구릉에 3번째 들어오게 된것이며 지금의 자리에 모셔 유릉(裕陵)이라 하였다가 후일 선조가 이곳에 합쳐져 목릉이 되고, 인목왕후가 들어와 3개의 릉이 목릉이라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