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이야기

숭릉 ==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능

노송☆ 2016. 11. 21. 20:48

@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맑음

@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1641-1674)과 비 명성왕후(1642-1683) 김씨 의 능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불모로가 있을 때 태어났다. 1649년(인조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1659년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숭릉 가는길

△▽숭릉의 전경

 

△ 승릉의 금천교, 숭릉의 금천교는 숭릉입구와 다른 방향으로 나 있어 금천교를 건너지 않고 숭릉

    정자각으로 갑니다.

△ 숭릉의 홍살문, 참도, 정자각, 그리고 봉분

△ 숭릉의 정자각은 보물 제1742호로 지정 되었으며 다른 능의 정자각과는 달리 팔작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정자각이 팔작 지붕을 하고 있는 정자각은 숭릉 정자각 뿐이다. 정청 정면 5칸, 배위청 3칸인 정자각은 정청에 익랑(翼廊 복도)을 설치한 숙종 즉위년(1674)의 모습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정자각(丁字閣) : 능 제향을 올리는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집.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정자각의 익랑

△ 좌측에서 본 정자각

△예감 : 축문을 태우는 곳

△ 정자각 우측에서 본 모습

 

 

△ 정면에서 본 숭릉

 

△▽ 석양과 석마

 

  •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 봉분이 나란히 2기로 조성된 능을 쌍릉이라고 한다. 높지 않은 언덕
  •  위에 쌍릉으로 조영된 숭릉은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  이 하나씩 놓여 있다. 곡장 안의 석양과 석호 각 2쌍과 망주석 1쌍이 초계를 이루었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으며, 하계에는 무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다.

  • 봉분 앞의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의 장릉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 위쪽에 ‘세호’라고 불리우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문석인은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모습이고 무석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절도 있는 모습이다.
  • 능의역사
  • 현종은 1674년(숙종 즉위) 8월 18일 34세로 창덕궁 대조전 양심각에서 승하하였다. 그 해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숭릉을 조영하였다. 12월 11일에 발인하여, 13일 건원릉 남서쪽 별도의 산줄기에 봉릉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84년(숙종 10)에는 현종의 비 명성왕후 청풍 김씨의 능을 조영하였다. 명성왕후는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 서별당에서 42세에 승하하였다.
  • 12월 7일에 소렴하고, 12월 9일에 대렴하였으며, 1684년 4월 3일에 발인하여 4월 5일에 봉릉하였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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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석인

     

     △▽ 문석인

     

     △ 망주석과 세호

     

     △▽ 장명등 : 왕의 장생발복을 기원하는 뜻의 등으로 팔각형이다.

                         숙종 명릉에서부터는 사각형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