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

도봉구 역사 문화 탐방기행 == 2탄

노송☆ 2016. 8. 28. 22:04

@ 2016년 8월 26일 금요일

@ 함석헌 기념관에서 김수영문학관을 찾아 걸어가보자( 25분 소요, 아래지도 참조)

@ 김수영 문학관

   한국문학의 대표적 자유시인인 김수영 시인이 생전에 시작(詩作) 생활을 하였던 도봉구에는 그의

   본가와 묘, 시비가 있습니다. 이에 김수영 시인을 기림과 아울러 600년 동안 마르지 않고 흐르는

   원당샘 공원, 연산군과 정의공주 묘, 그리고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둘레길과 더불어 자연과

   문학이 어우러지는 문화공간을 제공하고자 도봉구에서 김수영문학관을 건립하여 2013년 11월 27일에

   개관하였습니다.






@ 김수영 문학관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시인 김수영을 기리기 위해 도봉구에서 설립한 문학관.

   면적 1,201.67㎡의 5층 건물이다. 1층은 제1전시실, 수장고, 사무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은

   김수영의 삶의 궤적을 연대순으로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김수영 연보 및 6·25 전쟁과 4·19 혁명, 5·16

   쿠데타 등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며 그가 온몸으로 표현한 시와 산문의 육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다. 영상실

   에서는 김수영의 생애를 그 당시 사회상과 더불어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낭송·녹음실에서는 관람객이

   김수영의 시 7편을 직접 낭송하여 녹음 파일로 소장할 수 있다. 시작() 코너에는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

   자주 쓰이던 단어들을 집자()하여 시어() 막대를 만들어 관람객들이 이 단어들로 시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감상 메모 코너는 김수영을 만나고 난 후의 감상을 적어 벽에 걸어 놓을 수 있게 하였다. 수장고에는

    전시실에 전시된 것 외 1000여 점의 시와 산문 원고, 저서, 번역서 등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2층에는 김수영의 일상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제2전시실이 있다.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 작업하던 탁자

    등 인간 김수영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검색대에서는 김수영의 시, 산문 원고뿐 아니라 미발표

    원고, 신문 스크랩 자료 등을 검색할 수 있다. 독서대에서는 김수영의 시집, 산문집과 함께 김수영 관련

    서적들과 논문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3층에는 작은 도서관과 이동 열람실이 있으며, 4층에는 대강당이 있어 각종 세미나와 시 낭송회 등이 열린다.

    음향 시설과 책상 및 의자 등이 구비되어 있으며, 대관 신청시 무료로 제공된다. 5층은 옥외 쉼터 및 휴게

    공간이다.










▽  옥상에서 본 북한산

@ 김수용 문학관을나와 서울에서 가장 오랜된 방학동 은행나무와 연산군 묘를  찾아 본다.









▽  방학동 은행나무

    1, 보호수   2, 수령 : 830년,   3, 수고 : 25m,  4, 둘래 ; 10.7m



@ 연산군묘소와 역사를 같이한 은행나무

서울시 지정 보호수 1호로 높이 24m, 둘레 9.6m, 수령 800-1000년이 되었으며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 하였고 이 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  연산군묘

@ 연산군(1476-1506)은 성종(1457-1494)과 윤기부의 딸 폐비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7살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어 19세에 조선왕조 제 10대 임금이 되었다.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쓰고 시를 잘 짓는 임금이었다.

즉위 초에는 성종시대에 형성된 평화로운 풍요가 그대로 이어져 왔었고 성종 말기에 나타낙 시작한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하여 구체적인 금제절목을 만들어 강력한 단속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민간의 동정이나 관료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변방지역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을 회유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ㅜ업에 귀감이 되도록 헸다.

종묘제도를 정비하고 상평창을 설치치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호적신년을 개정하여 백성의 불편을 해소하기도 하였고 비융사를 성치하여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는 등 국방에도 힘을 모았다.

그러나 생모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게 되고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통하여 크나큰 옥사와 선비를 죽였으며 계속되는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을  탕진했으며, 생모 윤씨를 왕비로 추존하여 회묘를 회릉이라 고친 뒤 성종는에 함께 제를 지냈다. 성균관을 주색장으로, 원각사를 기생들의 집합소로 , 홍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꿔버리는  등 무수한 실정을 거듭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병사 했다. 군부인 건창신씨(연산군부인) 사이에 2남1녀, 후궁 소생으로 많은 자녀들을 두었으나 아들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모두 귀양지에서 죽었다.


▽ 묘 뒤에서 내려다 본 연산군묘역

연산군은 유배지인 교동도에 안장되었다가 연산군 부인 폐비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여 1513년 오늘날의 도봉구 방학동에 이장 되었다. 연산군묘는 그간 비공개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6년 7월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다.

▽  앞에서 올려다 본 묘역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연산군묘에 있는 까닭?

의정궁주 조씨는 본관이 한양인 조뢰의 딸로 태어나 세종 4년(1422)에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 태종이 승하하여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의정궁주 조씨 묘가 연산군묘역에 있는 이유는 이 땅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였으며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가 없는 의정궁주의 제사를 맡게 되어 현 위치에 의정공주묘를 조성하였고 그 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 군부인 신씨의 요청에 의하여 의정궁주 묘 위 쪽에 연군묘를 이장한 것이다.



@ 연산군 묘역에서 양효공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을 거쳐 간송 정형필 가옥을 방문한다.



▽  정의공주묘







▽ 간송 전형필가옥

@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 문화유산을 수준 높은 안목으로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연구하여 이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휘문 고등보통학교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을 스승으로 만나 그림및 고서에 남다른 취미를 보였고 일본 와세대대학 유학시절 종로 일대의 상권과 전국각지의 대토지를 물려받아 조선 최고의 경제력을 갖춘 젊은 간송은 일제 치하라는 시대적 아픔속에서 자신의 삶에 방향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이때 간송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이ㅡ로 서화가이자 금석학자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이다. 우리나라 서화가 인명사전인(근역서화장)을 간행하였던 위창의 문하에서 간송은 민족의 혼인 우리 문화재를 수호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안목을 키워나갔다.

간송은 일제가 수탈해 가는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였다. 간송은 1932년 인사동의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고서와 골동을 수집해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지켜낼 수 있었다. 10만석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으면서도 수집한 간송의 소장품에는 회화, 도자, 금속공예, 불교조각, 전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포함되어 잇고 지금꺼지 우리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집한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인 보화각(현 간송 미술관)을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 인재양성의 절실함을 깨달은 간송은 1940년 폐교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사학인 보성학교를 인수하여 후하ㅏㄱ양성에 힘썼다.  해방이후 거젓보존위원회와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하였고 1960년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여 동인지고고미술을 창건하였다.

1962년 1월 26일 자신이 태어난 종로4가 112번지 본가에서 향년 57세에 급성신우염으로 급서한 간송, 한평생 개인의 안위보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그의 숭고한 정신을 통해 지금 우리는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잇다.

@ 간송 옛집은 간송의 자취가 남아 있는 100여년 역사의전통한옥으로 간송 묘소와 어우러져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은 그의 양부가 경기도 북부, 황해도에서 오는 소출 관리를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부친 사망 이후 한옥 부근에 묘소를 꾸미고 비가 올때 제사를 지내는 재실로 이용 하였고 양주군 농장을 방문 하였을때 이용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대문과 담장 일부 및 건물이 피해를 입었고, 전쟁히후 종로구 본가 및 보화각의 피해 복구로 이곳의 수리가 지연되었다가 1962년  간송이 세상을 떠나고 종로의 본가가 철거되면서 나온 자재를 활용하여 부분적으로 수리가 이루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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