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유산 탐방

국가유산 탐방 6번째=김포 장릉

노송☆ 2024. 7. 24. 18:36

@ 2024년 7월 14일

@,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장릉은 제16대 인조의 부모인 원종(1580~1619)과 인헌왕후(1578~1626) 구 씨를 모신 능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태어났다. 왕을 뜻하는 ''이라는 묘호를 갖고 있음에도 원종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까닭은 그가 생존 당시의 왕이 아니라 추존된 왕이기 때문이다

@ 김포골드 전철을 타고 사우(김포시청)역 5번출구로 나와 도열하듯 쭉쭉 뻩은 메테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따라 직하면 김포시청앞에 도착되고 여기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가다가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비탈진 언덕차도길옆 인도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정상부에서 조금 내려가면  장릉입구가 나온다. 아래지도 참조, 사우역 5번 출구에서 도보로 15~20분 소요.

▼ 메테세쿼이아나무

▼김포시청

▼ 장릉 주차장

▼ 매표소옆에 있는 안내도

▼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 원종은 사망할 때 정원군인 ''의 신분이었으므로 양주 곡촌리(현재 남양주시 금곡동) 처갓집 선산에 초라하게 묻혀 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인조)이 왕이 되자 이미 고인이 된 정원군은 정원대원군으로 높여졌고, 10년 후에 묘호가 원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묘도 원으로 추승되어 흥경원이라 했다. 이후 원종의 무덤은 현재의 자리인 김포시로 옮겨지면서 장릉이 되었다.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뒤에 남다른 대접을 받은 셈이다. 인헌왕후는 아들이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이 되었고 궁호를 계운궁이라 했다. 1626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김포 성산 언덕에 예장했다가 원종의 능인 현재 자리로 천장했다.

▼ 매표실 

▼ 매표실 옆에 있는 역사문학관을 둘러본다. 

▼장릉은 난간석이 없는 쌍릉이다.  

▼ 장릉 정자각과 수복방(우측)

▼ 장릉의 모습

▼ 김포 장릉은 육경원에서 왕릉으로 변경되었지만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은 쌍릉 형식이다.

▼ 장릉은 정자각에서 능을 볼 수 있다. 

▼ 육경원 비석 받침돌

▼ 정자각 뒤 창문으로 보이는 장릉

▼ 정자각내부

▼ 장릉을 둘러 보고 숲길을 걸었다. 

▼ 아래지도 파란색 코스가 숲길 산책로

▼ 숲길 산책로에는 중간중간에 쉴 수 있는 의자가 있다.  

▼ 저수지 

▼ 재실

▼ 연못에는 연은 있는데 연꽃이 없다. 

▼ 재실앞에 배나무

▼ 원추리

▼ 숲길을 한 바귀 돌았다. 

▼ 매표소 정문

@ 천천히 장릉을 둘러보는데 약 2시간이 소요 되었다.(숲길 걷기 포함)

정원군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비범한 관상으로 부왕인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선조가 사망하고 이복형인 광해군이 왕이 되자 정원군은 잠재적인 정적으로 집중적인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특히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 김 씨의 무덤과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소문 때문에 광해군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은 성품이 호탕하고 인물이 훤칠하며 무예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마침 능창군이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는 상소가 들어왔다. 그러자 광해군은 곧바로 능창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죽였다. 광해군 7(1615)에 일어난 이른바 '신경희 옥사'.

정원군이 더욱 낙담한 건 아들을 잃은 지 2년 후였다. 지관 김일룡이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으니 그곳에 궁궐을 짓자"라고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새문동터는 정원군이 살던 집터로 광해군은 결국 그곳을 빼앗아 경덕궁(현재의 경희궁)을 짓게 한다.

정원군은 광해군이 나머지 아들들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술로 달래다가 40세의 나이에 화병으로 죽는다. 그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불안한 광해군은 정원군이 무덤 자리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도록 장례 기간을 단축하라고 재촉하며 조문객을 감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새옹지마'에 들어맞는 상황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정원군과 광해군의 싸움에서 광해군이 완승했다. 그러나 정원군이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1623년에는 광해군이 쫓겨나고 정원군의 큰아들인 능양군이 왕에 오른다. 광해군이 정원군에게만 신경을 썼지 실제로 왕의 기운은 능양군에게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원군의 부인인 인헌왕후는 아들이 왕이 되자 남편의 한을 풀듯 빼앗긴 새문동 집터(경덕궁)로 되돌아가 몇 년을 살다 1626년에 숨을 거둔다.

 

정원군은 원래 왕이 아니었으므로 장릉 역시 원제인 육경원으로 조성되었지만 왕으로 추존된 뒤 왕릉제에 따라 석물을 바꾸었다. 육경원을 의미하는 비석의 토대를 2008년에 발견해 비각 옆에 전시했고, 비석도 언젠가 발견될 것으로 추정한다. 재실은 능침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는데 현재 관리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솟을대문인 정문은 남다를 것이 없지만 재실 뒤로 후문이 열려 있다. 기본적으로 재실 문은 정문 외에는 좌·우측에 설치하는데 뒤쪽으로 문을 만든 까닭은 그만큼 현실적인 활용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홍살문에서 참도가 시작되고 우측에 배위가 있는 것은 일반 격식과 다름없지만 유독 참도가 넓다. 정자각까지 가는 중도에는 5계단이 있는데 자연의 지형에 어울리게 정자각을 지었기 때문이다. 지형이 높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만든 것이긴 하지만 참도에 계단이 있는 경우는 극소수다.

 

육경원에서 왕릉으로 변경되었지만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은 쌍릉이다. 봉분은 자연과 맞닿은 부분에 아무런 조각이나 무늬도 새기지 않은 초석을 둘렀고 혼유석을 놓았다. 2계와 3계에는 문·무인석을 한 쌍씩 세웠다. 팔각 장명등에는 꽃무늬를 화려하게 새겼으며 석호는 앉아 있지만 석마, 석양은 일반 석물과는 달리 배 부분이 막혀 있지 않아 배가 보인다.

 

조선 왕릉은 장명등의 창호2) 로 조산을 바라보면 조산 또는 안산의 봉우리와 연결되는 자연의 축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김포 장릉은 정자각이 중앙으로 보이며, 정자각에서 다른 왕릉과는 달리 두 개의 능침이 곧바로 보인다. 그렇기에 조선 왕릉 중 축 개념이 확실한 능역으로 평가된다.

 

정자각 좌측과 우측에 뽕나무가 있는데 좌측의 나무는 인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350년 정도의 나무다. 크지만 오디가 열리지 않는 반면, 우측 뽕나무는 작지만 오디가 많이 열린다고 한다. 뽕나무는 뿌리가 깊고 왕실을 상징하는 황색의 수피를 갖고 있다. 뿌리 속이 흰색이라 한약재로 상백피라고도 한다. 열매는 푸르다가 차츰 적색, 검은색으로 변한다. 오행 색을 갖추고 있어 예로부터 귀하게 여겼다. 오래된 뽕나무는 궁궐에도 있는데 특히 창덕궁 후원(비원)에 많다. 궁궐에서 기르는 뽕나무는 고급 비단의 어의를 만들기 위한 용도였고, 궁궐에는 누에를 기르는 잠실을 두었다.

 

왕실에서는 상례 때 왕과 비의 영혼이 의지할 신위를 혼전에 모시는데, 이를 우주(虞主)라고 한다. 우주는 뽕나무로 제작한다. 그래서 신위를 상주(桑主)라고도 한다. 우주는 종묘 터에 묻고 밤나무로 만든 신주로 부묘한다. 밤나무는 자손의 번성과 왕권의 영구한 승계를 의미한다. 인조는 아버지를 종묘의 혼전에 모시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장릉에 부모의 영혼이 의지할 뽕나무를 직접 심었다고 한다.= 퍼 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