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유산 탐방

국가유산 탐방 =경복궁

노송☆ 2024. 7. 14. 17:09

@ 2024년 6월 24일

경복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자 조선의 정궁(법궁)이다. 사적 제117호로 지정받았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3]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은 궁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5년간[5] 방치되다가 19세기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되었다. 당시에는 7천여 칸이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로 거듭났었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천 칸의 전각이 헐리고 매각되며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궁 궐내가 크게 훼손되었다. 1990년에 이르러서는 고작 36동의 건물(고종 재위 당시의 7% 수준)만 남았고 지금도 계속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사라진 전각들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최근 복원한 전각들도 원형이라는 보장은 없으며, 후일에도 완전한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시경(詩經)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景福)을 모시리라.’라는 시()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이름 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 광화문

@,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광화군주에 의한 덕화(德化)’라는 뜻이다. 광화문은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은 왕이, 좌우의 홍예문은 왕세자와 신하들이 각각 출입        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1968년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         하였다.

▼ 흥례문

@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중문으로 흥례예를 일으킨다라는 뜻이다. 원래 홍례문의 이름은 홍례문이었으나            1867(고종 4)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흥례문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

    서  철거되었다가,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후 2001년에 복원하였다.

   흥례문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흐르고 있는데 그 위로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

   를 놓았다. 영제교는 세종 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임진왜란 때도 큰 훼손 없이 있었다가 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보

   수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흥례문과 같이 철거되었다가 2001년에 복원하였다.

@,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의 근정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뜻으로,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낮은 기단을 두고 그 위로 중층으로 올린 건물로 안에서 보면 층 구분이 없는 통층(通層)이다.

근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있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정1품부터 정9품까지의 품계석을 놓았다.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는 4신상과 12지신상을 포함하여 28수 별자리상 등을 간결하지만 재치있게 조각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고, 북쪽 가운데에 왕의 자리인 어좌를 설치하였다. 어좌 뒤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고 천장에는 칠조룡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근정전에서는 정종, 세종, 세조, 중종, 선조가 왕위에 올랐으며,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 근정전 내부 어좌

@ 근정전 내부는 2개 층을 터서 높고 웅장한 공간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어좌를 놓아 왕의 권위을 상장화했다. 2001년에 흥례문과 외행각,영제교 등을 복원했다. 

@, 사정전(思政殿)사정선정을 깊이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이곳에서 매일 아침 업무 보고와 회의, 경연 들이 이루어졌다. 내부에는 근정전과 같이 왕의 자리인 어좌가 있고, 그 뒤로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다.

사정전 좌우에는 만춘전(萬春殿, ‘만춘’ : 만년의 봄)과 천추전(千秋殿, ‘천추’ : 천년의 가을)은 사정전의 부속건물로 사정전에 없는 온돌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사계절로 이용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세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고종 대에 다시 지으면서 독립된 건물로 지어졌다.

▼앙부일구

▼ 사정전

@, 사정전(思政殿)사정선정을 깊이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이곳에서 매일 아침 업무 보고와 회의, 경연 들이 이루어졌다. 내부에는 근정전과 같이 왕의 자리인 어좌가 있고, 그 뒤로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다.

사정전 좌우에는 만춘전(萬春殿, ‘만춘’ : 만년의 봄)과 천추전(千秋殿, ‘천추’ : 천년의 가을)은 사정전의 부속건물로 사정전에 없는 온돌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사계절로 이용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세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고종 대에 다시 지으면서 독립된 건물로 지어졌다

사정전 앞의 행각에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천자문 순서로 이름을 붙인 창고가 있는데 이곳에는 왕실의 물품들을 저장하였다.  .

 

▼ 강녕전

@,교태전(交泰殿)은 강녕전과 함께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던 침전이자,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교태천지, 음양이 잘 어울려 태평을 이루다라는 뜻이다. 교태전은 궁궐의 가장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왕비의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중궁전이라고도 부른다.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으나 1440(세종 22)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고 내부 모습은 비슷하나, 건물 앞에 월대는 없다.

1917년 창덕궁에 대화재가 나면서 창덕궁의 침전(대조전과 희정당 등)이 소실되자 교태전을 옮겨다가 대조전 복원에 사용되었고, 지금의 교태전은 1995년에 복원하였다. 교태전 서쪽에는 천문관측 기구를 모아두고 연구하였던 흠경각(欽敬閣, ‘흠경’ : 하늘을 공경하여 공손히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을 줌)과 교태전의 부속건물로 불교 행사를 행하였던 함원전(含元殿, ‘함원’ : 원기를 간직함) 등이 있다.

 

▼ 교태전 뒤 아미산 정원

@, 교태전 뒤편에 계단식 화단을 쌓아 아미산을 조성하고, 4기의 장식적인 굴뚝과 관상용 수석들을 배열해 정원을 만들었다. 아미산 정원은 뒷산인 백악의 정기를 침전까지 이어주며, 왕비의 후원답게 은밀하면서도 기품 있게 꾸며졌다. 

▼ 강녕전과 교태전을 동쪽에서 바라 본 모습, 용마루가 없다. 

▼ 향원정

▼ 향원정과 취향교

▼ 집옥체

▼ 건천궁에 들어가는 정문의 현판

 

▼ 열상진원샘

▼ 경희루

▼ 수정전

▼ 경복궁 조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