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

철원 평화전망대

노송☆ 2021. 12. 11. 21:32

@, 2021년 12월 10일

@, 몇일 전 순담계곡 잔도길 걷고 나서 노동당사 방문후 귀가 길에 월정리역 이정표가

     있어서  가보니 군부대가 있어 문의하니 미리 신청을 해야 한다면서 안내장을 주어

     받아보니 고석정에 있는 "철원DMZ평화관광안내센터"에서 접수 한다고 하여 전화을

     해보았다. 당일 현장 방문 접수 신청을 해야 한다고 한다. 코로나19 때문에 버스투어

     는 안하고 개별 자동차를 이용해야 한다. 오늘은 6대의 승용차와 안내자1대 해서 7대

     가 오전 10시 정각에 출발한다.

월정리역

@ 출발하기 전에 "철원 DMZ평화관광"차량이라는 것을 표시 하는 표지를 차량 지붕에       부착한다.

관광접수센터
안내표지

@,  평화 전망대 가는길에 두루미떼를 볼 수 가 있었다. 멀리서 현명하게 찍을 수가 없었

      지만 행운을 얻은 것이다.

@ 고석저을 출발한지 40여분만에 평화전망대 모노레카승차장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도보로 가기로 했다 걸어서 약 10분 정도 소요 되는데 걷는데 불편함이 없는 사람은 걸어 가는게 좋다.

전망대 모노레일카 정류장

@ 우리 일행은 걸어서 전망대를 가기로하고 천천히 걸어 가보니 약 10분이면 충분하다.

@ 철언평화 전망대는 2007년8월 중공하였으며 2층 전망대는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해 평강공원, 북한선전마을을 전망할 수 있고 하는데 우리가 간날은 안개로 인해 현명한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전망대에서 본 평강공원 일대 풍경

 

평화전망대에서 본 평강평원

@ 궁에가 세운 태봉국은 전망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평강공원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고 한다.

@ 신라의 왕살태생으로 전해지는 궁예(?~918년)는 일찍이 궁중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세달사에서 성정헌 후 북원(원주)의 양길 밑에서 들어가 세력을 키웠다. (892년) 특히 명주(강릉)등 영동지역 일대를 장악한 궁예는 사원의 수원승도 들을 세력기반으로 삼아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미륵사상을 내세우면서 부패와 혼란에 빠진 진성여왕(877~897) 통치하의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영서지방을 거쳐 철원으로 진출한 궁예는 계속 서진하여 고구려 세력의 중심지요 왕씨(王氏)세력의 아성인 송악을 장악한 후 후고구려를 건설하였다. (901년)한반도 전체를 통합하려는 야망을 지녀던 궁예는 국호를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으로 바꾸고(904년) 도읍지도 한반도의 중심지인 넓은 철원평야의 풍천원으로 옮겼다. (905년) 그는 새 도읍지에 대규모의 도성을 쌓고 국호도 다시 태봉(泰封)으로 바꾸었다. (911년)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체제를 수립하여 나갔다. 그는 불교적 이상세계 건설을 위해 자신을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체정치를 추구하였으나 이러한 신정정치는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계 호족들과의 불화와 갈등을 초래하여 궁예는 결국 그들과의 대결에서 패자가 되고 말았다. (918년) 비록 궁예는 몰락했지만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그의 정치이념과 대제국 건설의 이상은 왕건을 통하여 고려로 계승되었다. 궁예가 풍천원ㅁ의 새 도읍지 주위에 쌓은 태봉국 도성지는 현재 월정역 북방 비무장지대안에 놓여있다. 이 도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성으로 되어있으며 모두 남북우로 긴 사각형 형태이고 북쪽이 동쪽으로 9.5도 기울어져 있다. 성의 둘에는 외성이 12.5km, 내성 7.7km로서 대부분 토성이지만 일부는 현무암을 섞은 토석 혼축성이다. 해방 당시 외성의 하단 폭은 10.9m, 높이 3.6m 였고 내성의 하단폭은 3.6m, 높이 2.1m 정도였으나 최근 확인 결과 현재 남아 있는 성의 폭과 높이는  해방 당시 규모의 절반 정도이고 많은 부분이 붕괴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한 해방 당시에는 내선안 북쪽에 궁궐터인 포정정지(布政殿址)와 석등(해방당시 국보 118호) 그리고 외성 남벽에 남대문지와 석탑 및 돌거북 비석 받침돌인 귀부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확이니 어려운 상태이다. 또 도성안 동쪽에는 일제시대에 부설한 경원선 철도가 가로지르며 도성을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어 앞으로 이 도성의 조사와 연구는 남과 북이 뜻을 합하여 함께 추진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민족 공토의 과제로 남아 있다.

@ 대동방국(大東方國)의 꿈

 

@ 일찍이 철원 평야의 지정학적, 정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했던 궁예왕은 905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911년에는 국호를 만진에서 태봉으로 바꾼다.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잇다. 이는 대동방국(大東方國)건설을 국가이상으로 삼았던 궁예왕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태봉국도성은 (왕국성)의 둘레의 길이가 1.8km (내성)은 7.7km 에 달하며 (외성)은 12.5km 나 되는 3성구조 도성형식을 취하있다. 태봉국도성은 현재 DMZ 안에 갇혀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어 도성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태이다. 다만 일제 강점기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와 {조선고적도보}에 석등과 석탑, 귀부 등에 관한 사진과 설명이 있어 유적에 관한 흔적을 짐작게 할 뿐이다.

따라서 태봉국도송 재현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고대사 연구학자들과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견해을 바탕으로 하고 잇다. 또 한 동시대를 대변하는 고구려(안학궁)과 발해(상경용천부), 신라(왕경) 그리고 당나라와 일본의 3성구조와 방리제 양식을 모델로 삼고 있다. 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태봉국도성은  현제 군사 분계선을 중심으로 전확히 반쪽은 북한, 반쪽은 남한으로 양분된 형국이지만 이 금단의 땅은 오히려 21세기 남북의 화해와 협력 통일시대를 열러가는 시발지가 되고 있다.  천년 전  고려 건국의 토대가 된 태봉국의 이상과 정신은 남북 통합의 구심점으로 다시 일어나 통일시대 역사의 중심에 설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