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

경순왕릉과 숭의전

노송☆ 2018. 8. 14. 22:53

@ 2018년 8월 13일 월요일

@, 오전에 상현이 형으로부터 점심 식사나 같이 하자고 전화가 와 석송정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이율곡 유적지

     탐방을 같으나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월요일은 휴장이다. 방향을 틀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을 찾았

     갔다. 경순왕릉을 보고 숭의전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 이이 유적지는 월요일 휴관으로 밖에 있는 안내도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




@, 경순왕은 제56대 신라의 마지막 왕(927-935 재위) 으로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문성왕의

     손으로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완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국가가 후백제, 고려,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특히 후백제의 잦은 침입과 각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였다. 이에 민심도 신흥 고려로 기울러 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하들과 큰아들 일(鎰)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

    로 나라을 넘긴후 왕위에 물러 났다. 이후 태자 일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麻衣)을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

   을 먹으며서 보냈다고하여 일명 마의태자로 불린다. 태조의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

   으며 귀부한 지  43년 후인 978년(고려 경종 3년) 세상을 떠났다. 비보(悲報)를 접한 신라 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경주에 장례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조정에서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 나갈수 없다 하여 이 곳 장

   단부 고랑포리 성거산에 왕의 예로 장례를 모셨다.



▽ 경순왕릉 모습



@, 경순 와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는 것으로 고랑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

    인접한 나지만 한 구릉의 정상부 쪽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다. 경순왕의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던

    것을 1747년(조선 영조 23)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로써 되찾게 되었다. 따라서 경순왕릉

   은 조선후기의 양식으로 재정비되어 오능날 이르고 있으며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례가 행해지고 있다.

   경순왕릉 주변에는 1986년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재실 건물과 경순왕릉 것으로 보이는 비가 비

    각안에 놓여 있다..




@, 경순왕릉의 전체적인 형태는 조선후기 사대부 묘소의 전형적인 격식을 보이고 있으며 왕릉의 강 이 조성되어

     있을 뿐 주변의 석물들은 모두 조선 영조때 만든 것이다 . 능상은 원형으로 32매의 호석과 장방형의 곡장을

     두르고 있으며 능의 전면에는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다. 상단 계체석 위에는 능상 앞으로 능표와 상석이

    놓여져 있다. 중단에는 네 면에 사각 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이 직선상에 놓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석양과 망주석이 하나씩 서 있다.

   곡장과 호석은 형식과 문양의 형태로 보아 일제강점기인 1932년 보수를 하면서 성치된 것으로 보인다.




▽ 비각

@, 비각안에는 경순왕릉 추정 신도비라고 전해지는 대리석재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고랑포구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것으로 1976년 고량포 초등학교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1748년(영조24) 후손들이 발견한

    신도비로 추정하여 1986년 비각을 짓고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의 마모 상태가 심하여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비석의 건립연대는 모르지만 비석의 형태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 비각에 있는 비석







▽ 재실





@, 숭이전은  평화누리길 10구간 종착지이자 11구간 시작 지점이다. 이 곳은 2012년 7월 16일 평화누리길을

    걷기위에 왔던 곳으로 오늘 두번째로 방문하게 되었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6년)에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

   당을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 숭의전 홍살문

▽ 어수정(御水井)

△ 어수정은 고려을 건국한 왕건(王建 877-943 재위 918-918)이 물을 마신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왕건은 궁예의 신하로 있을때 개셩(당시 송악)과 철원 (당시 태봉)을 왕래하면서 중간 지점이었던 이곳에서

    쉬어가며 물을 마셨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곳 숭의전 자리에 왕건의 옛집 또는 왕건이 세운 앙암사

    (仰巖寺) 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 숭의전 입구





▽ 입구에서 본 숭의전 전경


▽ 앙암재(仰巖齋) :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촉, 폐 등을 보관하고 제관 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전사청(典祀廳) :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


▽ 숭의전(崇義殿):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정전


△▽ 숭의전 내부에 모신 위패


@,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 등 고려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7년)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숭의전의 제례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재 개성왕씨종친회와 승의전보존회의 주관으로 봄과 가을 두 차례에

    봉행되고 있다.

▽ 배신청(陪臣廳) : 고려 16공의 위패를 모신 곳


@ 배신청에는 고려조의 충신 16명 = 복지겸, 홍유, 신승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총,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등의 위패를 모셔 배향토록 하였다.

▽ 이안청(移安廳) : 숭의전의 청소 및 공사시에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 위패를 옮겨 모실 때는

                           이안제(移安祭)와 환인제(還安祭)를 올려 고유래(告由禮)를 행함



▽ 도봉구청 옆(중량천 뚝방 길) 걷기 좋은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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