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15

무의도 둘레길 걷기 2탄

@ 2024년8월1일@ 아래지도 6번에서 7번 해안 둘레데크길이 끝나면 7번에서 8번까지는 산길로 데크길과 산길로 이어진다. @, 위 지도 7번 지점에서 산길로 올라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러오고 나무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쉼터가 나온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간다. ▼ 다시 데크길을 만나지만 짧은 데크길이다. ▼ 100m거리에 전망대가 있다고헤서 가 봅니다▼ 전망대, 뒤 돌라 나와 데크해변길과 산길을 걷습니다. ▼ 멀리 하나게 해수욕장이 보입니다.▼ 전설이 내려오고▼ 산길을 30여분 걸으면 지도 8번지점 달우지에 도착된다. 8번지점에 있는 달우지 와 둘레길지도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여기도 해안선으로 하나게해수욕장으로 갈 수 없습니다. 좌측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산 능선 봉오리재 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아래지..

=도보 여행= 2024.08.04

무의도 해변 데크길 걷기

@ 2024년 8월 1일@ 무의대교가 개통 되어서 자동차로 무의도를 직접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무의도 해변 데크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무의대교가 놓기전에 다녀 와으니까 꽤 오래전에 다녀 온거 같다. 공항철도전철을 타고 공항 1터미널에서 내려 3층 7번 케이트로 나가니 09:40 분에 발차하는 (무의-1)번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이 버스는 무의도 큰무리선착장을 거쳐 하나게 해수욕장을 경유 광명항을 종점으로 반복 운행되는 버스이다. ▼무의 1번 시내버스 운행구간 및 요금표 ▼ 무의도연륙교인 무의 대교을 건너면 바로 로터리다 여기가 큰무리선착장 정류소(아래지도 1번)이다 여기서 내려 산쪽을 바라 보면 입구 계단이 보인다. ▼ 큰무리선착장 무의도 둘레길 입구 ( 위 지도 1번지점)▼ ..

=도보 여행= 2024.08.04

국가유산탐방 18번째 = 화성 융,건릉

@ 2024년 7월 30일오늘은 국가유산 방문 코스 중, 화성 융,건 을 방문하였다.융릉은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의 능이다. 근처에 위치한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장조는 1735년(영조 11) 창경궁에서 탄생해 그 이듬해에 세자에 책봉되고, 1762년 28세 때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영조가 뒤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고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의황제(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융건릉 가는 대중교통펀은 편리한 편인데 1호선 병점역에서 2번, 또는 3번출구로 나와 아래 지도에 표시된 3번 버스 정류장에서 34번, 34-1 번 버스에 승파하여 융건릉 입구..

국가유산탐방=전곡리 선사유적지. 당포성, 호루고루성

@ 2024년 7월 25일@. 연천 전곡리 유적(漣川全谷里遺蹟)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한탄강변에 있는구석기시대대  유적이다. 1978년 10월 2일 대한민국사적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한탄강,임진강 줄기를 따라 구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전곡리 유적이 규모가 가장 크고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전곡리 선사 유적은 구석기시대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밝혀 줄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동북아시아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연천 전곡리 유적 방문자센터에서 관람장에서 본 구석기시대@ 전곡리선사 유적지를 둘러 보고 당포성에 들였다. 당포성은 국가유산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호루고루성 가는 길목에 있으니 잠시 들려본다.  ▼ 당포성 모형▼ 당포성 위에는 팽..

국가유산탐방=공주 마곡사

@ 2024년7월 15일@ 마곡사 상가 앞에 무료 주차장이 있지만 (2주차장)약 2km 정도 걸어 가야하고 오늘 5곳 국가유산을 탐방하여 피곤도 하여 주차료 4,000원을 지불하기로 하고 1주차장까지 올라가 마곡사 입구까지 갔다. 주차장에서 바로 나오면 마곡사가 세계유산이라것을 알리는 커다란 비석 바위를 마주하게 된다. @,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 율사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절로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그뒤 1650년(효종 1) 주지인 각순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옛 모습을 찾았으나 1782년(정조 6) 다시 큰 화재로 영산전과 대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