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11월 25일 금요일
@ 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 안순왕후 능
@ 예종(1450-1469. 재위 : 1468-1469)은 제7대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세자였던 형(의경세자 덕종)이 일찍
세상을 떠너자 세자로 책봉된 후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예종은 재위 1년2개월 동안 각 도위 병영에 속한
전답인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결작하게 하여 백성들을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안순왕후(?-1898)는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딸로 , 1463년(세조 9)에 세자 후궁 소훈이 되었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 홍살문과 판위(망료위)
오는쪽 안내문 뒤에 있는 1평 정도 되는 판석을 깔아 놓은 것
망료위는 산릉제례중 임금이 왔을 때 이곳에 서서 인사를 하는 곳이고 사헌부 관헌이 제문을 불사를
때 불이 나는지 감독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 창릉의 참도
왼쪽의 높은 길은 신도, 오른쪽 낮은 길은 어도
▽ 정자각 동쪽에는 두계의 계단이 있다.
▽ 정면에서 본 안순왕후릉
▽ 장명등
▽ 무인석
▽ 문인석
▽ 망주석
▽ 석양
▽ 석호
▽병풍석 없이 난간석이 있다.
▽ 장명석
▽ 혼유석
일반묘에는 상석이라고 하는데 왕릉에서는 정자각이 있기 때문에 혼이 쉬는 의자라 하여 혼유석이라 한다.
▽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북을 달맞다하여 고석이라 한다.)
고석의 역활은 신을 부를 때 북을 울린다는 뜻이 있다. 절이나 부속에서 북을 치면서 재나 굿을 시작하듯
구석의 역활도 마찬가지다. 북석의 도깨비 귀문은 악귀를 막는 주술의 의미이다.
▽안순왕후 능에서 본 예종의 능
▽ 뒤에서 본 안순왕후 능
▽ 예종의릉
▽ 무인석
▽ 문인석
▽ 장명등
▽ 예종의의 능 전경
▽ 혼유석과 고석
▽ 고석에는 다른 고석과는 달리 귀면이 아닌 북고리가 무늬가 새겨져 있다.
▽ 안순왕후 처럼 병풍석이 없시 난간석만 세워져있다.
△▽ 잉(뒤)에서 본 예종의 능
▽ 전면에서 본 예종의 능
▽ 정자각뒤에서 본 창릉
오른쪽이 안순왕후 능이고 왼쪽이 예종의 능
정자각 하나에 정자각 좌우로 두 언덕에 늘이 있는 형태를 동원 이강릉이라 한다.
조선 왕릉 중에서 동원이강릉은 세조의 광릉이 최초다. 세조는 조선왕릉의 ㅈ제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왕이다. 석관 대신 회관을 쓰게 했고 병풍석을 두르지 말라 했으며 두 언덕에 정자각을 하나를
쓰는 "동원이강릉 이라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
창릉은 두 번째 동원이강릉이다.
▽ 서어나무 숲길 창릉을 마지막으로 탐방하고 서어나무 숲길과 소나무 숲길을 걸으며 서오릉의 탐방을 마쳤다.
▽ 소나무 숲길
▽ 예종의 가계도
@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가 20세로 죽자 9세에 세자로 책봉된다. 18세에 왕위에 오르지만 1년 2개월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이라 재위 중에 남긴 일은 별로 없다. 재미있는 예종의 이야기는 정순왕후가 1461년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이 때 예종의 나이는 1450년생, 우리식으로 따져도 불과 12살밖에 안 된다. 그래서 조선 왕중 제일 어린 나이에 아들을 본 기록을 남긴 왕이다.
인성대군은 예종이 죽기전에 죽었고, 제안대군은 4살이 불과해 왕위에 오르지 못하지만 천수를 다 누리고 살았다. 왕의 계승은 제안대군은 너무 어려서 안 된다 치더라도 제 2계승자인 17세의 월산대군을 제치고 자을산군이 조선의 9대 욍이 된것은 사람 됨됨이 월산대군보다 자을산군이 월등했다고 할까? 세조는 자을산군(성종)을 특히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희왕후는 자을산군을 선택했을까?
'왕릉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창원= 13대 명종의 아들 (0) | 2016.12.08 |
---|---|
홍릉 = 제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 (1) | 2016.12.07 |
경릉 =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서오릉) (0) | 2016.11.25 |
경릉 == 24대 헌종과 정비 효현성황후, 계비효정성황후 능 (0) | 2016.11.21 |
인릉 == 23대 순조와 비 순원왕후 김씨 능 (0) | 2016.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