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

준경묘와 영경묘

노송☆ 2016. 7. 21. 08:04

@ 2016년 7월 16일 토요일 , 비

▽ 준경묘 초입에 있는 두타산  안내지도

▽  능선까지 약 1km는 가파른 길이다.



▽  능선에 올라 서면 산 허리를 돌아 가는 편탄한 길이 나온다.

▽ 준경묘 입구 직전에 있는 미인송(정2품 혼례나무인 소나무)

2001년 5월 8일 산림청장의 주례로 충북 보은군 내속리산 상판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正二品松)을 신랑으로 맞아 준경묘역에서 세계 최초의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보은군수가 신랑(삼산초등학교 6학년 이상훈 대역)의 혼주가 되고, 삼척시장이 신부(삼척초등학교 6학년 노신영 대역)의 혼주가 되어 많은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이 거행되어 한국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정2품송과 혼례를 치렀으니 이젠 이 소나무는 정부인송(貞夫人松)이라 불러야 옳을 것 같다.



























@, 전주에 살던 이양무 장군이 이곳 삼척 땅 활기리에 묻히게 된 것은 고려 고종 18년(1231년) 그의 아들 안사가 지방 관리들과의 불화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고령의 부모와 그를 따르던 170여 가구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삼척 땅 활기리(活耆里)로 피신해왔는데, 그 이듬해에 운명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안사의 삼척 피신에 대해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전주에 살았던 지방호족인 목조에게 사랑하는 관기(官妓)가 있었는데,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한 산성별감(山城別監)이라는 관리가 그 기생을 탐하게 되자 목조와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그때 목조는 지방장관인 지주사(知州事)를 포함한 관헌들을 싸잡아 모욕을 하게 된다. 그러자 지주사는 산성별감과 음모하여, 이안사를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 등으로 음해(陰害)하려들자 만약 이것이 고려왕실에 알려지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할 수가 없다고 느낀 목조가 야반도주를 한다.”라 적고 있다.

오늘날 이양무의 무덤을 준경묘라 부르게 된 것은 고종36년(1899년)에 그 동안 실묘(失墓)하였던 이곳 이양무의 묘와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하사전리에서 그의 부인 묘를 찾아 대대적인 묘역 정비공사 후 이양무의 묘를 준경묘(濬慶墓)라 하고, 그의 부인 묘를 영경묘(永慶墓)로 정하면서다.






준경묘의 풍수설화
잘 알려진 명당자리에는 그에 따른 전설과 설화가 많이 있듯이 이곳 준경묘도 조선왕조 건국과 관련된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피신 와 자리를 잡고 산지 1년 만에 아버지(이양무)의 상(喪)을 당하게 된다. 이안사는 아버지 묘 자리를 구하려고 이산 저산 산등성이를 넘어 사방으로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 활기리 노동(盧洞)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고단하여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이어서 말하기를, "이곳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시신을 금관(金棺)에 안장하여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하는 것이었다. 동자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더 있다가 그들은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 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더구나 금으로 만든 관은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소 백(百) 마리는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고, 귀리짚은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처가에 간 이안사는 밭갈이 할 일이 있다며 흰 소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하여 소를 끌고 노동(盧洞)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처가에서 빌린 흰 소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고, 부친을 넣을 관은 귀리짚으로 대신하여 아버지의 장사를 치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준경묘 [濬慶墓]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풍수지리),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 영경묘


▽  홍살문과 제실 , 영경묘는 여기서 더 올라가야 한다.

▽ 비각

▽ 제실과 비각

▽ 예감


▽  영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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