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7월 16일 토요일 비
@ 조선 6대 왕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산왕으로 있다가 1456년 박팽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이 상왕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되어 모두 죽음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
어나고 다음해인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
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
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 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령월 공헌의 객사인 관풍헌
으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영조 2년(1726)에 세운 금묘비(禁標碑)와 영조 39년(1763)에 세운 단묘재본부사유지비가
있어 옛일을 전하고 잇다.
△▽ 단묘재본부사유지비각
단묘재본부사유지비는 1763년 세원진 것으로 총 높이 162cm 크기의 오석으로 제작되었는데 앞면에는
" 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터이다" 라는 글이 영조대왕의 친필로 음각되어 있고 그 뒷면에 "영조 39년
계미년 가을 울면서 만들어 쓰고 어명에 의하여 원주감영에서 세웠다, 지명은 청령포이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 단종어소는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다. 어소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및 관노들이 기거했던 행랑채가 있으며 밀반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어소 담장안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가 위치해 있다.
▽ 어소 안에서 본 소나무 숲
▽ 행랑채
▽ 관음송
청령포 수림지에 위치하고 잇는 소나무 단종 유배시의 서ㅓㅇ화을 간직하고 있으며 1988년 천년 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엇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 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이 유베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이라 불리어 왔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 서로 비스듬히 자랐다.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단종 유배지시의
수령을 약 60년생으로 추정하고 잇다.
▽ 금표비
단묘재본부시유지 북쪽에 있으며 앞면에는 " 청령포 금표" 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이라 쓰야 있으며 측면에는 " 승정 99년"
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 노산대에서
▽ 관음송앞에서
▽ 노산대 길
▽ 노산대에서 바라 본 풍경
▽ 노산대에서 바라 본 망향탑이 있는 방향
▽ 망향탑
청령포 뒤산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층암 절벽위에 잇는 탑느오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항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 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 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 망향탑에서 바라 본 풍경
▽ 청령포 조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