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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조선왕릉이야기 ==홍릉(洪陵) 26대 고종과 명성황후 능

노송☆ 2013. 8. 26. 12:42

@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맑음

@ 교통 : 대중교통 : 경춘선 전철 금곡역에서 도보로 10-15분 소요

@ 홍릉은 고종과 그의 비 명성황후 민씨 합장 능이다.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전화 : 031-591-7043

@ 고종(1852-1919,재위 1863-1907)은 홍선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이들로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익종(추존 문조)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아버지 홍선대원군이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1873년(고종10)친정을 선포하고(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 1876),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을 체결하는 등 대외개방정책을 펼쳤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혁명(1894), 을사변(1895), 아관파천(1896)등 근대 한국의 주요 사건을 겪으며 1897년(광무1)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홍릉에는 원지원도 형식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 수련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뜻)의 연못이 아닌 가운데 둥그선 섬을 두고 연못 전체의 형태도 원형인 원지원도 형식의 연못이 조성 되어 있다.

△ 홍릉으로 가는 길

△ 홍릉금천교 왼쪽은 재실, 오른쪽이 홍릉가는 길

△ 홍살문

△황제릉으로 조성된 홍릉은 기존 조선왕릉과 석물의 위치와 종류, 숫자가 다르며 정자각 대신 일자각 침전이 자리하고 있으면 참도도 좌우길은 낮고 가운데 길이 높은 3도로 되어 있다.

@ 황제릉에는 석물이 침전 앞 좌우에 설치 되어 있다.

△ 1쌍의 석마가 좌우로 세워져 있다,

    홍살문에서 부터 말1쌍, 낙타, 해태, 사자, 코끼리, 기린, 무인석, 문인석 등 1개씩 침전앞 좌우에 세워져 있다.

△ 낙타

△해태

 

△사자

△코끼리

△기린

△무인석

△문인석

△안내판

△홍릉의 침전

@조선 왕릉의 정자각 계단은 동쪽에 있지만 침전에는 전면에 3계의 계단이 더 있다.  가운데는 황제가 올라가는 계단이다.

△침전의 동계,  침전은 정면 5칸, 측면4칸 이며 팔작지붕이다.

 

△어정

△ 능역에서 번 풍경, 왼쪽 부터 어정, 비각, 침점

△홍릉은 명성황후(1851-1895)의 능호지 고종의 능호가 아니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는 일제에 의해 살해되어 시신조차 불에 태워진 명성황후는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왕후가 입던 옷을 유해삼아 겹이불과 겹옷을 입히는 소렴과 대렴이 끝난 뒤 시신없는 빈 관만으로 동구릉 숭릉(현종의 능)옆에 묻혔다. 이 때 고종은 숙릉이란 능호를 내렸다. 얼마전 동구릉에서 발견 된 숙릉터가 명성왕후 첫 능이다. 아관 파천이후 러시아 공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왕후를 명성황후 로 추존한다.그리고 11월 21일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2년만에 성대하게 다시 치르고 청량리동에 장사 지내며 능호를 홍릉이라 한다.

     

 

@ 일제의 강점기에 있던 조선은 고종 능호를 사용 할 수가 없섰다. 고종의 능호를 쓴다는 것은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성황후와 합장하는 방법을 택한다.

고종이 승하하고 대렴이 끝나자, 1월 30일 오후 4시부터 남양주시 금곡동에 능을 잡고 산역을 시작한다,

그날 같은 시각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에서도 능을 파기 위한 공사가 벌어진다.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구실을 댄 홍릉 천장은 고종의 산역과 똑같이 시작 됐고 2월 12일 오전 6시에 현궁을 열었다. 2월16일 오후 4시, 명성황후는 금곡으로 이장됬다. 3월3일 발인한 고종의 장래행렬이 금곡에 도착했고, 먼저와 있던 명성황후와 고종은 3월 4일 합장된다. 명성황후와 합장 됬으니 명성황후의 홍릉이라는 능호를 쓰는 것을 일제로서도 막을 방법이 없섰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고종은 명성황후와 21년만에 지하에서 함께 잠들었다. 나라를 빼았긴 망국의 황제가 능호를 갖는 방법은 이밖에 없었던 것이다.

△▽홍릉은 최초의 황제릉이기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효릉 능설제도를 본떴으나 그야말로 어설픈 흉내에 불과하다.

 

 

△가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고추 잠자리가 곡예를 부리며 놀고 있네요

 

 

 

△왕릉의 정자각 대신 침전인 일자각이 있고 황제 참도인 3도가 놓였다, 왕릉과는 달리 일자각 앞에 문인석과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서로 홍살문 가까이 까지 늘어서 있다.

망국의 황제릉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전통 왕릉의, 문, 무인석과는 거리가 멀고 조악하기 그지없는 석물들이 상설 되었다. 여기에 상설되어 있는 기린은 아프리카산의 동물이 아니라 용이나 봉황 같이 상상의 동물로 상서로운 동물이다.

△ 앞에부터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순이다.

△ 홍릉의 재실

△ 유릉 가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