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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순례(창덕궁편)

노송☆ 2013. 7. 31. 20:07

@ 2013년 7월 26일 금요일 흐림

@ 한국은 1988년 세계문화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에 가입했다. 2012년 현재 총 10곳의 세계유산과 15개의 인류무형구전및 무형유산걸작, 9개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중 세계문화 유산 9곳( 석굴암, 불국사<1995>, 해인사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덕궁<1997>, 수원화성<1997>, 고창,화순,강화고인돌유적<2000>, 경주역사유적지구<2000>,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마을<2010>)과 자연유산 1곳(제주 화산성과 용암동굴<2007>) 을 차례로 탐방 순례하기로 하고 오늘 1차로 창덕궁을 순례한다.

 

 

△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의 모습

   서울은 한양이라 불리는 조선의 도읍지였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은 모두 조선시대의 궁궐이다. 경복궁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조선을 대표하는 궁이지만, 창덕궁이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창덕궁은 조선의 3대왕인 태종 5년(1405)에 세자를 위한 궁으로 지어졌지만 선조 25년 (1592)에 임진왜란으로 불탄것을 광해군이 왕에 오르면서 1609년에 창덕궁이 가장 먼저 복구하였다. 이후로도 부주의로 인한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여 복구 하였다.

△ 매표소쪽에서 바라 본 돈화문

돈화문은 우리나라에서 남아 있는 궁궐정문으로는 가장 오래 되었다.

"돈화"는 왕이 큰 덕으로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 는 의미을 담고 있다.

돈화문 2층 문루에 큰 종과 북을 매달아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오(낮12시)는 북을 쳐서 알려주고,

통행금지 시간을 알려주는 저녁종은 오후 7시경에 28번, 통금 해제 시간인 새벽 4시경에는 33번을 졌다고 합니다.

△ 돈화문을 들어서 몇발짝 걸으면 왼쪽으로 널고 높게 가지를 뻗은 수백년된 3그루의 나무를 볼 수 있다.

    이 나무는 수령 300-400년 정도 된 회화나무다. 이 나무는 학자의 높은 기상을 상징해 학자수라고 한다.

    중국의 주나라에서 궁궐의 정문과 정전의 대문 사이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가장 높은 직위의 삼공이 나무 아래서 마주보고 정사를 돌보았다는 전통을 이어 받아 한국의 궁궐 입구에도 회화나무을 심었다.

△ 창덕궁이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표지석

△ 금천교

정전을 가기 위해서는 금천교를 건너야 한다. 금천교는 궁월과 왕릉에 있는데 궁궐의 금천교는 궁궐의 초입에 명당수라는 개천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다. 창덕궁에는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 위에 설치되어 있는 금천교는 아름다운 난간석과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기술이 돋보이는 다리다.

△ 창덕궁 금천교의 난간석과 석수 , 석수는 금천교 난간석 네 귀퉁이에 설치하여 오가는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2개의 무지개(홍예) 모습을 한 금천교에는 여러가지 문양과 조각이 장식 되어 있다. 각각의 문양과 조각은 궁궐을 지키기 위한 수호신입니다. 오른쪽인 남쪽 밑에 있는 것은 해치입니다. 해치는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 악인을 미워한다는 상상의 동물입니다. 현재 서울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정의을 지키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해치를 조각해 놓았다.

△ 금천교의 왼쪽 북쪽에는 거북이 조각 되어 있습니다. 풍수지리에서는 현무라 해서 거북과 뱀이 합쳐진 상상의 동물을 북쪽의 수호신으로 놓았습니다.  거북과 해치 바로 위에는 도깨비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궁궐밖에서 금천을 통해 악한 것이 들어 오는 것을 막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금천교 위에서 해설사로부터 해설을 득고 있는 관광객들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으로 들러선다.

△ 진선문을 통과한 관광객들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입니다.

 

△인정전입니다.

   인정전은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는 창덕궁의 정전입니다. 인정전 앞 넓은 마당을 조정(朝廷)이라 합니다. 이곳에서 왕의 즉위식, 외국 사신 접견, 과거시험 등 나라의 큰일을 치렀습니다. 조정을 보면 가운데 길이 있고 양 옆으로 비석 처럼 세원진 돌들이 있다. 관리의 직급을 나타내는 품계석이다. 조선시대에는 종 9품부터 정1품까지 18단계의 품계가 있었다.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을때 신하들이 자신의 품계에 마춰 설 수 있도록 표시 한것이다. 왕이 있는 곳과 가까울수록 품계가 높다. 동편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한다.

△ 품계석

△ 인정문을 들어선 관광객들이 문화 해설사의 해설을 듣고 있다.

△ 조정에서 인정전으로 가려면 하월대와 상월대라는 두 개의 기단을 올라야 한다, 인정전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더욱 위엄이 있어 보인다. 월대 계단에는 세 개의 길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중앙의 계단 가운데 경사진 돌판에 봉황 두 마리가 조각 되어있다. 왕이 가마를 타고 오르는 답도이다. 봉황은 성군이 나타나거나 나라를 잘 다스려 태평성대가 되면 나타난다는 상상의 새입니다. 왕이 지날때마다 답도에 새겨 놓은 봉황을 보면서 선정을 베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상징물이다. 답도의 좌우의 계단은 신하들이 사용하는 계단이다.

△ 상,하월대 위에는 "드므" 라는 큰 철로 만든 독이 있다. 화재를 막기 위해 물을 담아 두었던 것이다.

    드므는 실제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화재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목조 건물의 약점은 화재에 약하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불이 나는 것은 화마가 불울 놓고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한 화마가 이 드므에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의 험성굿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서 도망가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 인정전 바닥은 전돌이 깔려 있던 것을 서양식의 쪽나무로 깔았다.

△인정전안 정면에 왕이 앉는 평상인 용상을 설치한 어좌가 마련되어 있다.  그 뒤로 왕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 하는 오봉산일월도 병풍을 쳤습니다. 오봉산 일월도에는 해와 달, 다섯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있다.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있다.

△▽ 내부에는 현대의 시설물이 설치 되어 있다. 유리창과 커튼, 전등 등의 시설은 모두 대한제국 시기에 서양식으로 내부시설을 현대화한 흔적이다. 인정전은 외부에서 보면 2층 건물으로 보이나 안에서 보면 통층으로 되어 있다.

 

 

△ 상,하월대 앞에 있는 드므

△ 인정전 측면 모습

△ 인정전 동쪽으로 난 문을 통해 나오면 보이는 선정문앞과 희정당 현관앞 풍경.

△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선정문

△ 선정전 천랑

△,선정전은 왕이 평상시 거처하면서 업무를 보는 편전이다. 왕이 매일 아침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각지방에서 올라온 문서를 검토하고, 국정세미나인 경연을 하는 집무실이다.

△ 선정전 내부

 

 

△희정당 중간의 출입구 부분을 앞으로 뛰어 나오게 해서 서양식 현관을 만들고 바닥에는 타원형으로 왕이 타던 마차나 차가 다닐수 있도록 했다.

△ 선정전 지붕은 조선의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일명 청기와 지붕이다. 당시 청기와는 중국에서 수입된 고급 건축자재다. 임진왜란때 불에 탄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청기와를 올린것이다. 당시 왕이었던 광해군이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의 위상을 화려한 궁궐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싶었던 마음을 표현 한거 같다.

△,회정당 현관

△ 회정당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 인정전과 희정당 현관

△왼쪽은 희정당, 오른쪽은 대조전, 두 건물간의 통로는 양쪽 끝에 복랑으로 이어져 있다.

△희정당 내부

   희정당은 왕의 침실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업무 공간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

   희정당은 1917년 발생한 큰 불로 인해 모습이 바끠게 되었다. 1920년에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와 지은 것이다. 이때 완전히 새로운 건축물로 태어 난것이다. 실내는 서양식 흔적이 여러 곳에서 확인 된다. 응접실과 회의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리고 천장에는 썅들리에가 걸리고, 벽에는 유리 창문을 내는등 서양식 시성을 갖추었다. 의자와 탁자 등 가구도 서양식이다.  대한제국시기에 외국인을 접견하는 일이 많아져 한국식과 서양식이 섞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희정당은 한국의 전통물이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 희정당 뒤편에 있는 것이 대조전이다.

 

△ 대조전으로 들어가는 선평문

△선평문을 통해 본 대조전

△, 대조전

   대조전은 왕비가 살았던 곳이다. 대조는  큰 것을 만들어 낸다 라는 뜻이다. 왕비가 생산하는 큰 것이란 무었일까? 훗날 위대한 왕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왕자를 출산하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조전에는 인정전이나 선정전에서 볼 수 있는 용마루가 없다. 훌륭한 왕자를 얻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야 한다고 믿어 하늘의 정기와 땅의 기운을 가로 막는 용마루를 두지 않았다, 창덕궁 대조전뿐만 아니라 침전인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창경궁 통명전 등 에도 용마루가 없다. 또 다른 설로는 다음대를 이을 용(왕자)이 태어나는곳에 감히 다른 용이 지붕위에서 짓누를 수 없다는 것과 왕비가 편안하게 왕자를 낳으라고 무거운 용마루를 걷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조전도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1917년 화재로 소실된것을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다 재건 하였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여서 복구공사가 일본인에 의해 이루워졌다. 멀정한 경복궁 강녕전이나 교태전을 옮겨와 경복궁을 허문것이나, 기본 구조는 그대로 따랐지만 실내장식을 비롯한 대부분이 서양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본이 우리 문화를 유린하고 파괴하는 데 큰 이유가 있다.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 옆 날개채와 뒤 편의 경훈각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보와 행각으로 연결되었다.

△ 경훈각

△▽ 너구리와 우물

 

△ 경훈각 뒤편 후원

△ 희정당 마당

△성정각(세자의 교육장소)

△ 성정각괴 보춘정

△ 한 건물에 보준정, 희우루 현판이 붙어 있다.

△ 낙선재 부근의 풍경

 

△장락문으로 통하여 본 상량정과 낙선재

△▽ 낙선재

       낙선재는 제24대 헌종(1827-1849)의 서재겸 사랑채로 사용 했다.

 

△▽ 석복헌

       헌종은 첫 왕비 효현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다시 왕비를 간택했는데, 전례없이 본인이 직접 간택에 참여했다. 이때 삼간택에 남은 세 사람중 헌종은 경빈김씨를 마음에 두었으나 결정권은 대왕대비에 있었으므로 효정왕후 홍씨가 간택된다. 이로부터 3년뒤 왕비가 있는데도 생산 가능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새로 맞은 후궁이 경빈 김씨다.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이 석복헌은 경빈 김씨를 위한 헌종의 지극한 사랑에 의해 탄생한 집이다.

 

△석복헌의 전경

△▽ 수강재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제23대 순조의 왕비)의 거쳐였다.

 

△수강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