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새재길 따라 과거 보러 가세 1탄 ......
그래도 나에겐 로멘틱 2010/11/25 19:13
@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맑음
@ 옛날 옛날 양반님들 개나리봇짐에 짚신 몇켤래 매달고
큰 꿈을 품고 넘던 고개 문경새재를 다녀 왔습니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때 이후로 약 500여 년 동안 한양과 영남을 잇는 가장 번듯한 길이었다. 당시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고개는 모두 3개. 추풍령과 문경새재, 죽령이 있었으나 문경새재가 열나흘 길로 가장 빨랐다. 반면 추풍령은 보름길, 죽령은 열여섯길. 하루 이틀 사이였건만 문경새재는 과거시험 치는 선비들이 유독 고집했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 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어 문경새재를 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 고갯길이 아직 비포장으로 남아있게 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덕이라 한다. 1970년대 중반 문경을 순시하다 무너진 성벽 위로 차량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차량통행금지를 명령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까지 문경새재가 흙길로서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 입구에 있는 옛길 박물관입니다.
꼭 견학 하시길....
주흘관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문경관문 중 첫 번째 관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관문 설치의 필요성에 따라 많은 논란 끝에 1708년(숙종 34년)에 석성과 함께 세워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좌우에 협문이 각각 1개씩 있다. 중앙에 높이 3.6m, 너비 3.4m, 길이 5.4m의 홍예문이 있으며 좌우에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의 석성을 축조했다.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뒤편에는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 문경새재길은 제 1관문인 주흘관부터 제3관문까지 넓고 잘 정리되어 있어
걷는데 전혀 불편함이없다.
@ 같이 한 우리 일행의 뒷 모습
@조령원터 : 주흘산 조령관문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을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다.
문경새재는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하여 수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새재내에만 동화원 신혜원등 3곳의 원터가 전해지고있다.
1470년(성종 초) 경에 건립되어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二翼工),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앞 우측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교귀정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매년 가을 문경문화제 때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문경새재의 교귀정은 복원된 것이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인처이다. 주흘관과 조곡관의 중간 지점인 용추(龍湫) 옆에 있다.
숙종 때에 성을 개축하고 관방을 설치하면서 주흘관과 조령관에만 관방을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다. 그 후 불에 타 홍예문만 남은 것을 1978년에 복원하면서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주흘관에서 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령관 보다는 남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좌우에 협문이 1개씩 있다. 중앙의 홍예문은 높이 3.6m, 길이 65.8m이고, 좌우에 높이 4.5m, 폭 3.3m, 길이 73m의 석성을 축조하였다. 문루 뒤쪽에는 영남제2관(嶺南第二關)이란 현판이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