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11월 5일 화요일
@, 은행나무길 이어 현충사까지 탐방하기로 한다. 은행나무길 끝에서 현충사까지 거리는 약 700m 정도다.
현충사는 초등학교 때 가보고 이 번이 처음이다. 50년이 넘어서 다시 방문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때 방
문한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는다.
@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나라 사랑 정신을 널리 알리고 이를 되새기기 위한 곳이다. 1706년(숙종32)에
아산 유생들이 조정의 허락을 받아 세운 사당이며 1707년 숙종 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내렸다.
이후 충무공 이순신과 조카인 강민공 이완을 모시는 사당이었으나 1868년(고종5) 홍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으로 헐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는 충무공 종가의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져 충무공의 묘소와 위토
(제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토지)가 은행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이에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이를 지키기 위해 기금 모금 운동을 벌였으며 1년도 안 되어 묘소와 위토를 지키게 되었고 1932년 6월 현충사
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후 1966년부터 1974년까지 현충사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현재의 현충사를 세웠
으며 1932년 지어졌던 구현충사는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해마다 충무공이 태어난 4월 28일(음력 3월8
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여 다례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 현충사 입구의 은행나무
▽ 현충사 정문입니다.
▽ 정문에 들어서면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이 있습니다.
▽ 기념관에 전시 된 전시물을 몇 장 찍었습니다.
▽ 충의문
▽ 충의문을 들어서서 20m 가면 우측으로 구골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 현충사 충의문 가는 길에 있는 반송 아름다움의 극치다.
@ 현출사는 이곳 백암리 방화산 기슭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장군이 혼인하여 살던 옛집과 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곳이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십년 간 무예를 연마하여 서른 두 살 되던 해(1576, 선조9)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108년이 지난 1706년(숙종32년) 이곳에 공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사당을 지
었으며 1707년 숙종 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 사액을 하였다.
▽ 홍살문
▽ 충의문
▽ 현충사
▽ 충무공 이순신 영정
▽ 현충사 사당에서 바러본 풍경
▽ 사당 담장
△ 고택(故宅)
이집은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던 집으로 이후 증손이 대대로 1960년대까지 살았던
곳이다. 400여 년간 종손들이 살면서 부분적으로 늘려 짓거나 고쳐 지었으며 집 뒷면에는 이순신의 위패
를 모신 가묘(집안내 사당)가 있다. 매년 이순신이 전사한 날인 음력 11월 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활터의 은행나무
▽ 이순신 후손의 묘
▽ 이 면의 묘
@, 이면은 선조 10년 (1577년)에 아산에서 태어나 선조 30년(1597) 일본군과 싸우다 21살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전사한 지 220여년 뒤인 정조 20년(1796) 이조 참의의 벼슬을받았다.
▽ 장려
@ 정려
정려는 조선 시대에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내린 현판을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걸어 두고 마을
사람들을 하여금 본받게 한 정문을 말한다. 이 정려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하여 강민공 이완. 충숙공 이홍무,
충민공 이봉상, 효자 이제빈의 현판이 걸려 있다.
▽ 충무공 이순신 현판
▽ 현충사 단풍
▽ 구 현충사
@, 구 현충사는 숙종32년(1706)에 아산 유생들의 청원으로 지어졌으나 고종 5년(1868)에 흥성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다. 1931년 이르러서는 더수 이씨 충무공과 종가의 채무로 이충무공 묘소의 위토가
경매에 부쳐지자, 정인보, 송진우, 김병로 등 민족 지사들은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이충무공의
유적 보호에 앞장 섰다. 채무 변재를 위해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성금 모금 운동이 펼쳐졌고, 온 국민의 호
응을 얻어 채무를 변재하게 되었다. 채무를 벼재하고도 돈이 남자 "이충무공유족보존회"는 1868년에 혈렸던
현충사를 1932년에 다시 짓고 사액 현판을 달았다. 1966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으로 현재의 사당을 크게 지
으면서 현 위치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