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

행주산성

노송☆ 2019. 1. 4. 21:48

@ 2019년 1월 4일 금요일 흐림 최저 영하7도 최고 영상4도 미세먼지 나쁨

덕양산 정상에 축조된 행주산성(사적 제56호)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승명을 포함한 2천3백명으로 왜군 3만 여명을 크게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났던 곳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 장군은 이 터에서 3만 왜군을 막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수원 독산성에 포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총 지휘관이 되어 선조 26년(1593) 2월 11일 승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을 포함한 장병 만 여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진주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우리나라의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재주머니 던지기'라는 전법이 쓰였다. 아낙네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는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을 거들었는데,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성 안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 등 유물이 많이 나와 아마도 백제 때 처음 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주산성 내에는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셔놓은 충장사가 자리한다. 원래는 행주나루터 안마을에 정면3칸, 측면1칸의 규모로 행주기공사가 있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고 1970년 대대적인 행주산성 정화공사 때 이곳에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워 경역을 조성하였다. 1602년 건립한 행주대첩비가 비각 속에 남아 있으며 1963년에 세운 대첩비도 서 있다. 이 비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썼다. 이곳은 자유로가 개통되고 신행주대교가 완공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져 휴일이면 많은 나들이객들이 찾아온다.


▽ 행주산성 버스 정류장에서 바라 본 행주산성 정문 방향




▽ 권율장군 동상




@, 여성

우리군은 산성위에서 화포와 강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았다.

싸움이 오래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져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주어돌로 싸움을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녀자들의 호국에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하여 그 후 부터"행주치마"라는 말이 더 유명해졌다.



@ 승군

승군은 승려의 몸으로 전투에 참가한 군대였다. 승군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은 행주산성의 서북쪽에 있는 자성에서 지을 치고 있었다. 왜군이 계곡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에 불을 질러 한때 목책의 진지가 위태로왔다.  이때 권율장군이 진두진휘하고 승군장 처영이 독전하자 승군은 육박전으로 왜적을 쳐서 끝내 그들을 격퇴시켰다.


@ 의병

의병은 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자원한 민간인으로서 구성된 군대였다.  행주산성의 의병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장군을  따라온 전라도 의병이 많았다.  의병은 관군에 비해 무장이 허술하고 훈련이 부족하였지만 사기는 헐씬 높아 칼, 도끼 등을 들고 관군과 함께 공방전을 펼쳤다. 적이 목책에 불을 놓으면 물로 불을 끄고 화살이 다하며 돌로 적을 쳤다.


@ 관군

    권율장군이 가장 높은 지휘소에서 왜군의 정세를 살피던중 왜군이 목책에  접근하여 올 때에 큰 북을 세번

    치자 우리 군은 활을 쏘고  차포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죽음를 무름쓰고

    교대로 산성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을 넘으려 했다. 이에 권율 장군은 큰 칼을 뽐고 진두지휘 하니 

    전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 산성 올라 가는길







▽ 행주산성



▽ 덕양산 정상부에서 본 북한산 방향 미세먼지로 뿌였다.


▽ 충의정

    1977년 건립한 영상교육관으로 임진왜란과 행주대첩 승리에 대한 영상물을 상시 상영한다.

▽ 정상부에 있는 살구나무

▽ 덕양정

  1970년 건립한 정자로 한강과 인근의 서울과 김포시, 고양시 등의 경치를 관망할 수 있다.

▽ 행주대첩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와 신 행주대첩비

▽ 방화대교










▽ 행주대첩비

   행주산성에는 2기의 행주대첩비가 있다. 대첩비각 안에 있는  초 건비는 경기도 문화제 제 74호로 1602

   (선조25)년 권율장군이 돌아가신 후 휘하 장수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이며 행주대첩의 승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인 최립의 문장ㅇ과 명필 한성봉의 글씨였으나 현재는 마모되어 식별이

   어렵다. 인근 행주성원에 있는 행주대첩비는 1845년(헌종11)에 왕명으로 세운 중건비이며 앞면은 초건비의

   내용을 옮기고 뒷면에는 비를 세우는 이유를 추가한 것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74호이다.


▽ 행주대첩비, 독양정, 성산대교



▽ 신 행주대첩비

   높이 15.2m 의 석탑이며 1970년 행주산성 정화사업으로 건립한 것으로 "幸州大捷碑"는 박정희 대통령 글씨다.

▽  앞 부터  마곡철교(공항철도),  가양대교, 성산대교


▽ 앞 부터 행주대교, 김포대교

▽ 대첩기념관 앞  반송


▽ 유물기념관으로 행주 대첩 당시 무기고와 군량창로 추정되는 곳에 1980년 건립 하였다. 전시물은 홪차,

    신기전(기), 총통(기) 등 무기류와 대첩기록회, 대첩비문 탁본, 권율 장군 친필, 기타 산성에서 발견된 유물

    등이 있다.







▽ 충장공 권율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70년 건립한 것이다. 매년 행주대첩이 있었던 3원14일(양력)을

    기념하는 제례행사가 열린다.




▽ 1966년 건립되었으며 높이는 5m 좌대높이는 3.35m로 근대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이다.

    동상 뒤편의 4폭의 부조물은 행주대첩 당시 관군, 승병, 의병, 여성들의 치열한 항전모습이다.

@ 약 1시간 30분 정도 행주산성을 둘러 보고 평화누리길 4코스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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