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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곡선생 기념관 탐방

노송☆ 2018. 10. 31. 23:03

@ 2018년 10월 14일 일요일

@ 얼마전 기념관을 찾아지만 월요일 날아라 휴관하여 탐방하지 못하고 오늘 다시 찾게 되었다.


▽ 정문입니다.

▽ 좌측에 있는 신도비

@, 율곡이이 신도비(栗谷李珥 神道碑)

    조선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이이 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이다. 선생의 아명은 현룡, 자는 숙헌,

    호는 율곡,석담,우재, 본관은 덕수, 시호는 문성이며 자운서원 외 전국 20여개 성원과 사우에 배향되었다.

    이 신도비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인조9년(1631) 4월에 건립된것으로 이항복이 글을 짓고 신익성

   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이 썼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앞뒷면에 걸쳐 각자되어 있는데 규모는 높이

    223cm, 너비109cm, 두께 39cm 이다.



▽ 자운서원 외삼문

 @, 자운서원 : 기념물 45호

   자운성원은 조선 광해군 7년 (1615)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이(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서원이다. 효종 원년(1650)에 자운 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뒤 숙종 39년(1713)에 이이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1548-1631)과 현석 박세채(1631-1695)를 추가로 모셔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0년 문성사(사당)

  와 내삼문을 복원하였고 1997년 강당과 동, 서재를 복원하였다,

  2012년 11월 자운성원 위치 고증을 위하여 실시한 표본시굴조사에서 문성사 축대 전면에서 창건 당시로 추정되

  는 건축물의 지대석과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연호로 보아 숙종 7년에서 14년(1681-1688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또한 같은 시기에 자운서원내 느티나무 2그루의 수령을 의뢰한 결과 가가 426년과 447년으로 조사 되

  었다.


▽ 자운성원 안내도


▽ 동재와 서재 사이의 마당에서는 사임당과 자운성원 추향제를 지내고 있었다.








▽ 446년 된 느티나무 ㅂ보봏보호수로 지정되었다.



▽ 강인당



▽ 강인당

@ 강인당

   유생들의 강학 장소로 지금믜 교실 역활을 랬던 곳이다. 1997년에 신축하였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내삼문과 문성사


@ 자운성원 묘정비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 의 학문과 덕행을 기릭 위하여 건립된 자운성원의 내력을 적은 숙종 9년(1683)

   네 세워졌다. 비는 서원의 내삼문 밖 우측에 있는데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

  의 개석을 올렸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으며 머리글은 김수향이 썼다.  



▽ 문성사 안에는 율곡 이이 영정이 모셔져있다.


@ 문성사

   위폐(죽은 사람을 모시는 나무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건물로 중앙에 육곡 이이 선생 오른쪽에

   사계 김장생, 왼쪽에 현석 박세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흥선 대원군의 성원 철폐명령으로 헐어진 후

   1968년 3월에 유림이 국가 지원을 받아 중건하였다.





▽ 율곡 이이 선생의 묘지로 들어가는 문이다.



▽ 율곡 이이 가족묘 안내도

@,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노씨묘를 비록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선생의 형 이선 묘, 아들 이경림

    묘 등 가족묘 14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중 이이의 묘소는 부모의 묘소보다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와 관련

    해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했을 경우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 풍습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이의 부인 곡산노씨의 묘는 이이의 묘보다 조금 위쪽에 전후합장묘의 형태로 조성

    되어 있는데 , 이이 신도비문에 의하면 "노부인은 임진왜란을 만나 서울에서 신주를 받들고 산소로 돌아와 왜

    적을 꾸짖다가 살해를 당하였는데 일이 나라에 알려지니 정려를 세웠다 고 전해 진다.


▽ 묘지로 올라 가는 길




△▽ 1= 이이의 맏형부부묘,    2= 이이의 부모묘,    3= 이이의 맏아들묘

▽ 이원수와 신사임당 묘

    율곡이이의 아버지 이원수(1501~1561)와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의 합장묘이다.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의 뛰어난 여류 서화가였으며 사임당은 당호로서 그 뜻은  당시 최고의 여성상인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은다는 것이다. 신사임당은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7세에 이미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본보기로 삼아 배웠다고 한다. 그림 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썼으며 한시

   잘 지었다.

   신사임당은 유학의 대가 이이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남편을 잘 보필한 아내로서 그리고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가로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묘역은 봉분앞 중앙에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일렬로 놓여 있으며 좌우로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 율곡이이의 묘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율곡 이이의 묘이다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한 이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십만양병

    설, 대동법실시, 사창의 설치 등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객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저서로

    동호문답, 상학집요, 격몽요결, 등이 있으며 대사헌을 비롯하여 대제학, 호조, 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

    다.

   이이는 유학에 있어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이황과 서경덕의 설을 절충하여 일월론적 이가이원론

   을 주장하였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세상을 떠난 후 이곳 파주 자운산 선

   산에 묻혔는데 묘역은 부인 곡산노씨 묘와 위아래로 조성되어 있다. 봉문 정면에 상석과 오른쪽에 묘비가 위치

   해 있으며 좌우로 망주석 문인석을 세웠다.


▽ 율곡 이이의 묘

△▽ 율곡이이의 묘




▽ 이 날은 31회 율곡 뮨화제 기념 행사가 있었다.

▽ 율곡 기념관 내부 모습이다.









▽ 전시관 2층에서 본 자운서원 전경

▽ 행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