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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이야기==사릉==정순왕후릉

노송☆ 2016. 11. 18. 20:24

@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맑음

@ 교통 : 대중교통 = 경춘선 전철을 이용하여 금곡역하차,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23, 77, 7-7, 55번 버스

                             이용  사릉입구 하차

 

@ 사릉은 비운의 단종의비, 정순왕후(1440-1521)가 잠든릉이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18세의 정순왕후는 영월로 떠나는 17세 소년왕 단종(1441-1457)과 애끓는 이별을 하고 살아서 다시는 낭군을 볼 수 없섰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마지막 자리였던 영도교는 영영 이별한 다리, 임이 영원히 건너간 다리가 되어 애절한 전설을 남긴다.

 

 

@ 사릉은 조선6대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송씨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1454년(단종2)에

   왕비로, 책봉 되었다. 다음해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왕후는 의덕왕대비로

    진봉되었다.

△사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거리가 다른 왕릉보다 매우 짧다.

@ 1457년에 단종을 복위코자 한 사육신 사건으로단종은 노산군으로, 대비역시 노산부인으로 강봉되었다.

   그 후 노산군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면서 단종과 생이별을 하고 동대문 밖 연미정동에 초가를 지어 정업원(지금의 청룡사)이라 이름을 짓고, 그곳에서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사릉의 참도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지 않고 정자각 직전에서 끈어졌다

@ 단종이 17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한 것을 알게 된 정순왕후는 매일 절 뒤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해했다. 정순왕후는 소생없이 82세까지 살았다.

 

△비각

 

 

△숙종대 복위 왕비릉이라 장명등도 사각옥개석이며 무인석이 생략되어 문인석만 있다.

   봉분을 호위하고있는 영석과 호석도 각 1쌍식이다.

△ 우측의 문인석

△ 좌측의 문인석

△ 망주석

△▽ 양석과 호석

 

@ 중종은 단종부터 7대에 걸친 왕대를 산 정순왕후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정씨(해주정씨) 가족묘역에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1698년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묘셔져 있다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평생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불였다.

 

△ 사릉 우측의 해주정씨묘역

@1521년(중종16년) 단종부터 7대의 왕대를 살았던 정순왕후가 82세로 죽자 중종은 대군부인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다. 후사가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 시집인 해주정씨 집안에서 장사를 주도했고 해주 정씨 묘역에 안장되었다. 문종의 외손이었던 정미수는 정순왕후가 후사를 부탁하고 죽자 정순왕후의 제사를 봉향한다.

숙종 24년 (1698) 그녀가 단종과 함께 복위되자. 사릉총리사 최석정은 숙종에게 이런 사연을 알리고 "사릉은 본래 정미수 개인 땅이며 왕후께서 살아서 후사를 부탁했으므로, 능으로 봉해졌다 해도 정씨 묘소를 옮기면 정순왕후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이라고 정씨 묘역을 그대로 둘것을 청했다.

이에 숙종은 "해가 오래된 묘는 일찍이 옮기지 않는 예가 있다 그대로 두라"고 허락했다. 능으로 결정되면 가차 없이 당해야 했는데 정순왕후를 돌본 공으로 해주 정씨의 묘역은 이런 연유로 지금도 사릉 능역에 남아 있다.

△ 곡장 뒤에서 본 사릉 풍경

△사릉은 사초지가 낮아 아래에서도 능역이 보인다.

△정자각 뒷문으로 본 사릉

△ 사릉예감 뚜껑이 있다.

 

 

 

 

△곡장의 기와문양

 

△▽사릉에는 노송들이 사열하듯 도열해 서 잇다.  

 

 △ 정자각과 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