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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조선왕릉이야기 ==경릉(제24대 헌종)

노송☆ 2013. 7. 2. 10:22

@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 왕릉의 명칭

1), 곡장 : 1), 능역을 동, 서,북 방향을 둘러 싸고 있는 담벽을 말한다.

               2), 조선시대에는 왕릉과 왕족에게만 곡장 설치를 허가 했다.

               3). 풍수적으로 살기를 뛴 바람이 능침안으로 드로치지 못하게 하고 좋은 기운을 가둘수

                   있도록 그 형태와 높이에 세심함을 볼 수 있다.

2), 난간석 ; 1), 난간석은 외부에서 능침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울타리 역활을 한다.

                 2), 조선 왕릉가운데 재위 왕의 릉은 반드시 난간석을 두었다.

                 3), 세자자 추종등의 경우는 난간석을 두지 않았다.

                 4), 난간석은 석주, 동자석주, 죽석으로  이루워져 있다.

3), 혼유석 : 1), 일반 묘에서는 흔히 상석이라 하고  제물을 차려 놓고 제를 올리는 곳이다.

                 2), 왕릉은 정자각에서 재를 올리기 때문에 릉앞의 상석을 혼유석이라 한다.

                 3), 혼유석의 하부는 4-5개의 둥그런 모양의 고석(鼓石)으로 받치고 있으며 고석을 북석

                     이라고도 한다.

                 4), 고석의 사방 중앙에는 양각으로 어두문과 귀면상이 새겨져 있고 어두문이나 귀면상은

                     사악한 것을 경계하기 때무ㅜㄴ에 험상굿은 표정이다.  

                 5), 고석 아래 반석이 있고 그 아래 왕의 시신이 안치된 석실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무거운

                      혼유석을 들러내지 않고서는 석실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 혼유석은 왕의 시신이 있는

                     석실을 영원히 봉인한 명품 자물서ㅣ라 할 수 있다.

 

 

 

△ 난간석

 

@ 경릉은 제24대 헌종과, 정비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능이다.

    조선 왕릉중 유일하게 세개의 봉분을 가진 삼연릉 왕릉이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된 왕릉 제도가 아니다. 우선 헌종 9년 1843년 16세로 승하한 효현왕후 김씨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하였고, 능호를 경릉(敬陵)으로 올렸다, 그로부터 6년후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김씨의 좌측에 모셨다. 1904년에는 73세로 승하한 헌종 계비 효정왕후 홍씨를  효현왕후 김씨의 우측에 안장하여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을 가진 왕릉이 되었다. 본래 왕릉 장법에서 왕비의 능에 왕을 합장할 경우엔 새로운 능호를 쓰게 되어 있다.  중종과 숙종은 같이 묻힐 것을 미리 전교했었고, 그럼에도 중종의 경우는 능호를 따로 올렸다. 와이 따로 능호를 쓰지 못하고 왕비의 능호를 따라간 예는 경릉이 유일하다. 이는 왕을 안동김씨 왕비 옆에 부록처럼 묻어버린 것이니 당시 정권을 주도 하던 안동김씨가 왕실을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효전왕후 홍씨마저 옆에 장사 지내니 경릉은 실로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 큰 길에서 경릉으로 가는 입구 입니다 ,  이정표도 있네요.

 △ 경릉으로 가는 길은 숲속 길로 걷기 좋은 길입니다.

 △ 경릉의 입구는 홍살문과 일직선상에 있지 않습니다.

 

 △ 다른 능과는 달리 참도 주변을 넓은 반석으로 넓게 깔아 놓았다.

 △ 정자각 동쪽 모습

 △ 이익공 정자각 입니다.

 △ 정자각 제향실

  △▽ 정자각의 아름다운 연등천장

 

 

 

 

 △정자각뒤의 예감(정자각 좌측)과 산신석(정자각우측)

 △ 조선 왕릉중 유일하게 세개의 봉분을 가진 삼연릉이다.( 왼쪽 계비 효정왕후, 가운데 효현왕후,

     오른쪽 헌종)

 

 

 

 

 

 

 

▽△ 석호와 석양

 

 △▽ 무인석과 문인석

 

 

 △▽ 총탄 자국인가?  그럼 6.25때 격전지?

 

 

 △ 경릉의 뒤에서 본 모습

 △ 비각안의 표석 : 대한, 헌종 성황제경릉, 효현성황부좌, 효정성황부좌

1908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진종, 헌종, 철종을 황제로 올리면서 제작한 비이다. 따라서 경릉비석에는 "대한"과 "황제"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글자는 기존의 정릉 표지석을 깎아서 다시 새긴 것이다. 표석의 전면과 후면에 새긴 글은 규장각 대재학 김학진이 지었고 당시 명필인 윤용구가 썼다.

                           

 

 

 

@ 헌종은 익종(翼宗: 추존 왕)의 아들로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순조의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청 하였다. 순조때 정권을 잡은 안동 김씨와 새로 등장한 풍양조씨 두 외척이 세력을 다투다가 한때 풍양조씨가 집권 하였으나 1846년(헌종12)조만영이 죽자 정권은 안동김씨로 넘어갔다. 1839년(헌종 5) 많은 천쥬교 신자를 학살(기해사옥)하고 천주교인의 적발 방법으로 오가작통법을 적용하였다. 1841년(헌종 7) 비로소 친정을 하였으나 산정(三政_의 문란과 국정의 혼란으로 민생고가 더욱가중 되었다. 15년동안 재위하였고 슬하에 자식 없이 1842년(헌종 9) 16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효현왕후 김씨 : 영흥 부원군 김조근 딸로 1828년(순조28년)에 태어났다. 1837년 (헌종 3)왕비에 책봉되었고 1841년에 가례를 올려 왕후가 되었으나 2년만인 1843년(헌종 9)16세 나이로 슬하레 후사없이 세상을 떠났다.

@ 효정왕후 홍씨 : 익풍 부원군 홍재룡의 딸로 1831년(순조31)에 태어나 효현왕후가 죽은후 1844년(헌종 10)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으나 5년 뒤에 헌종이 돌아가소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철종8) 순원 왕후가 죽자 왕대비로 지내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1904년(고종 41)에 세상을 떠났다.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그곳은 헌종에게 진정 사랑했던 책과 그림, 그리고 여인을 위해 존재했던 공간이다. 헌종은 마침내 품에 안게 된 사랑한 여인, 경빈 김씨를 위해 낙선재를 지어 사랑채로 이용했다. 옆에는 경빈 김씨의 처소로 석복헌(錫福軒)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