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연산군묘==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묘
@ 연산군묘
@ 연산군(1476-1506)은 성종(1457-1494)과 윤기부의 딸 폐비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7살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어 19세에 조선왕조 제 10대 임금이 되었다.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쓰고 시를 잘 짓는 임금이었다.
즉위 초에는 성종시대에 형성된 평화로운 풍요가 그대로 이어져 왔었고 성종 말기에 나타낙 시작한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하여 구체적인 금제절목을 만들어 강력한 단속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민간의 동정이나 관료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변방지역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을 회유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ㅜ업에 귀감이 되도록 헸다.
종묘제도를 정비하고 상평창을 설치치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호적신년을 개정하여 백성의 불편을 해소하기도 하였고 비융사를 성치하여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는 등 국방에도 힘을 모았다.
그러나 생모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게 되고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통하여 크나큰 옥사와 선비를 죽였으며 계속되는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을 탕진했으며, 생모 윤씨를 왕비로 추존하여 회묘를 회릉이라 고친 뒤 성종는에 함께 제를 지냈다. 성균관을 주색장으로, 원각사를 기생들의 집합소로 , 홍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꿔버리는 등 무수한 실정을 거듭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병사 했다. 군부인 건창신씨(연산군부인) 사이에 2남1녀, 후궁 소생으로 많은 자녀들을 두었으나 아들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모두 귀양지에서 죽었다.
▽ 묘 뒤에서 내려다 본 연산군묘역
연산군은 유배지인 교동도에 안장되었다가 연산군 부인 폐비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여 1513년 오늘날의 도봉구 방학동에 이장 되었다. 연산군묘는 그간 비공개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6년 7월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다.
▽ 앞에서 올려다 본 묘역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연산군묘에 있는 까닭?
의정궁주 조씨는 본관이 한양인 조뢰의 딸로 태어나 세종 4년(1422)에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 태종이 승하하여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의정궁주 조씨 묘가 연산군묘역에 있는 이유는 이 땅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였으며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가 없는 의정궁주의 제사를 맡게 되어 현 위치에 의정공주묘를 조성하였고 그 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 군부인 신씨의 요청에 의하여 의정궁주 묘 위 쪽에 연군묘를 이장한 것이다.
@ 연산군 묘역에서 양효공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을 거쳐 간송 정형필 가옥을 방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