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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조선왕릉이야기 ==목릉편(인목왕후 김씨)

노송☆ 2013. 7. 1. 17:47

@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맑음

@ 능역을 장대석을 놓아 3단계로 구분 하고있다.

  1), 상계 : 능침을 포함하여 망주석과 혼유석이 있는 구역을 상계라 한다.

  2), 중계 : 장명등과 문인석, 석마가 있는 구역을 말한다.

  3), 하계 : 무인석과 석마가 있는 곳을 말한다.  

 

 

△ 인목왕후 앞 신도

△ 정자각과 선조능

△ 인목왕후 신도는 정자각과 일직선이 않인 여러번 각이 꺽긴채 이어졌다.

△ 인목왕후 능

△▽ 인목왕후능의 좌우 무인석이 다르다.

 

△문인석

△ 병풍석 없이 난간선으로 둘러쳐져 있다.  

△ 혼유석과 고석, 그리고 귀면

△장명석

 

 

△양석

△ 뒤에서 본 인목왕후 능

 △호석

 

 △▽ 무인석과 문인석의 뒤 모습

 

 △ 왼쪽의 선조능, 오른쪽은 의인왕후능

 △인목왕후능

△ 건원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 인목왕후  김씨 

인목왕후(仁穆王后)1584(선조 17)∼1632(인조 10). 조선 선조의 계비. 연안김씨(延安金氏)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제남(悌男)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에 광해군 보다 10살 아래 나이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이때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嫡統論)에 입각하여 적출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고,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패륜행위는 결국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서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