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 = 왕릉이야기 강릉편
@ 2013년 6월21일 맑음 금요일
@ 발목 부상으로 장거리 도보 여행이나 자전거 여행은, 아직 완전이 회복 되지 않아 무리가 될거 같아, 병실
에서 읽었던 [조선 왕릉이야기 ]생각이나 무리하지않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왕릉을 탐방 할 수 있을거 같
아 회복 될때까지 서울 근교에 있는 왕릉을 탐방 하기로 한다.
@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 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
로 등재되었다. 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을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은 건국이래 산릉제
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종종악원} 이 능기신제(기일에 올리는 제사)
의 전통을 이어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신릉제가 엄숙하게 행해진다.
@ 조선 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聖(성)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俗(속) 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
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2),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 (즉 정자각 부분)
3),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 이다.
@@ 강릉(康陵) : 조선 제13대 명종과 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으로 쌍릉이다. @@
1),명종(明宗)은 11대 중종의 둘째 아들로 1545년에 인종이 승하하자 12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20세까지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553년(명종 8) 수렴청저을 거두고 친정을 하며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인제를 등용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국정은 혼란하였다. 1563년 외아들 순회세자를 잃고 2년후에 어
머니 문정왕후가 세상을 뜨자 병약했던 명종은 병을 얻어 1567년(명종22년)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다.
2),인순왕후 :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32년에 태어나 1543년(중종 38)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1545년에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75년(선조8)창경궁 통명전에서 승하 했다.
3),명종이 34세로 죽자 이곳을 능지로 삼아 치장하였으며, 인순왕후 사후 왕비의 능도 왕의 능과 함께 나란
히 앉혀 쌍릉을 이루었다. 능제는 국조오례의식(國朝五禮儀式)에 따랐고 왕릉과 왕비릉에 모두 구르무늬
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12면의 병품석(屛風石)을 두르고 만석 중간에 문자로 12지를 새겨 넣었다. 12칸의
난간석과 상석1쌍, 망주석 1쌍, 양석 2쌍, 호석 2쌍, 3면의 곡장이 있다. 한 단 아래 문인석 1쌍, 마석 1쌍,
장명석이 있고 그 아래에는 무인석 1쌍과 , 마석 1쌍이 있다.
△ 강릉 초입구간, 매표소가 있지만 올해까지 무료 개방한다.
△ 강릉 알림판
△ 강릉가는길, 왕릉은 어디나 울창한 숲으로 이루워져 맑은 공기와 함께 탐방하기가 좋다.
△금천교,
궁궐에도 금천교가 있지만, 능에도 금천교가 있다. 능역의 신성함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금천교를 건너면 홍살문이 나온다.
이곳 부터 왕릉의 영역임을 알리는 문이다. 홍살문의 홍 살수는 9, 11, 13개로 크게 분류 한다.
가운데는 3개의 살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삼지창이라고 하고 태극모양이 3태극인데 이것은 천, 지, 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배위,
홍살문 우측옆에 약 1평정도의 돌을 까라 놓고 왕이 이곳에서 4배를 하여 제향을 올리러 온것을 알린다.
△ 정자각 동편 계단 , 좌측은 혼령의 계단, 우측은 제관이 올라 가는 계단
△ 정자각 뒤편 모습.
혼령이 제향을 받은후 뒤문을 통하여 돌다리를 건너 신도를 따라 능역으로 가는곳
▽△ 뒤에서 본 강릉
△▽ 앞에서 본 강릉
△ 봉분의 장식석들, 만석,병풍석,인석, 동자주 난간석 석주,지대석 등등 내용 설명은 다음에..
△무석인
△문석인
△망주석
△양석
△호석
△만석문늬
△ 혼유석과 고석
△장명등
△▽정자각과 서쪽계단
△비각과 수복방터
△정자각 익공
△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참도
@ 명종때 사건==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 일파 소윤이 윤임 일파 대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시 외척간의 싸음이었으나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이었다.
1498년(연산군 4)이후 약 50녕간 관료간의 대림이 표면화 되면서 나타난 대옥사는 을사사화로 마지막이 되었다. 사림파는 4차례의 사화를 통해 큰 피해를 입고 세력이 약해졌으나 후에 서원과 향악으로 선조 때 다시 중앙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사림파는 사화에서 생겨난 당파의 분파를 토대로 붕당을 형성하였다.
@ 교통 : 6호선 화랑대역 1번 출구에서 : 202, 1155, 1156, 1225, 73번 버스 승차 , 태강릉 정류장 하차.